아일랜드 안의 영국. 북아일랜드 [출처] 아일랜드 안의 영국. 북아일랜드|작성자 gonugol
아일랜드는 영국을 구성하는 네 지역 중 하나로, 브리튼 섬에 있는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와 더불어 아일랜드 섬에 있는 지역이다.
이때부터 영국과 아일랜드의 대립이 아일랜드의 남북 분쟁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아일랜드 땅에서 신교도(성공회 신자)와 구교도(가톨릭 신자) 사이의 기나긴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1845년 아일랜드에 대기근이 일어나면서 병충해가 발생해 감자의 수확이 크게 줄어들었다. 아일랜드 대기근은 몇 년간 계속됐는데, 이때 100만 명이 넘는 아일랜드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그런데도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았다. 북아일랜드의 신교도와 구교도 사이의 갈등은 더욱 깊어지면서 1910년대에 구교도들은 군사 조직인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을 만들어 신교도들을 테러하기 시작했다.
1937년, 아일랜드 남부 지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북아일랜드 지역은 영국령으로 남게 됐다. 이때부터 북아일랜드의 신교도와 구교도 사이에 분쟁이 심해졌다. 북아일랜드가 영국령이 된 것은 신교도들의 뜻이었다. 북아일랜드의 정치와 경제를 잡고 있던 신교도들은 북아일랜드가 아일랜드령이 되면 자신들이 누려온 권력과 부가 사라질 것을 두려워했다. 영국도 산업이 발달한 북아일랜드를 아일랜드에 넘길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 북아일랜드의 정치와 경제를 잡고 있던 신교도들은 오랫동안 구교도를 차별했다. 정치에 참여할 권리조차 주지 않았다. 1968년 참정권과 공직에 출마할 권리를 요구하는 구교도들을 신교도들이 경찰을 동원해 무자비하게 진압한 일이 있으면서 아일랜드 공화국군은 신교도들을 공격했다.
구교도와 신교도의 대립으로 북아일랜드는 혼란에 빠졌다. 결국 영국은 북아일랜드에 군대를 파견했다. 영국의 개입은 구교도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게다가 1972년 1월 30일, 일요일에 평화 시위를 벌이던 구교도들을 영국 군인이 총으로 쏜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을 '피의 일요일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후 아일랜드 공화국군의 테러가 끊이지 않았다
1998년에 가서야 영국과 아일랜드 공화국군은 평화 협정을 맺었다. 평화 협정을 이끌어낸 공로로 북아일랜드의 정치가인 존 흄과 데이비드 트림블은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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