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 고향 엡워스 (Epworth Wesley Memorial Methodist Church, St. Andrew's P…
당시 엡워스 일대 상세지도
출처- 1990년 한경수 감독이 번역하신 『수산나 웨슬리의 생애』(레베카 라마르 하몬 저)에 있는 자료, 당시 엡워스는 질척질척한 늪지 였는데 지금은 작은 강들은 대부분 메꿔지고(지금도 길 옆으로 수로가 있다) 구불구불한 길은, 쭉 뻗어 달리다가 갑자기 꺾어지는, 전형적인 링컨셔 도로로 바뀌었다. 지도상으로 루트 마을과 엡워스마을이 잘 나와있다. 지도 맨 밑 오른쪽에 로마숫자 MDCXXVI 는? M - 1,000, D - 500, C - 100, X - 10 이니까 1626년의 배수로를 표시한 지도인 것 같습니다. 사무엘 웨슬리는 1662년 태어났고 엡워스에 도착한 건 1697년입니다. "엡워쓰, 아직까지 세계의 그 어느 곳보다도 더 사랑하는 곳." 탄생 300주년을 맞아 지난 5월 18일 엡워쓰의 웨슬리 생가 근처에 세워진 동상 밑에 새겨 넣은 웨슬리의 말이다. 요한 웨슬리는 1703년 6월 17일 엡워쓰의 사제관(올드 팩토리)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는 1714년 런던의 기숙학교 차터하우스에 진학하면서 고향 엡워쓰를 떠났지만 그 후 무려 34 차례씩이나 엡워쓰를 방문했다고 한다. 그만큼 웨슬리에게 엡워쓰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서린 영혼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엡워쓰는 런던에서 자동차로 한 다섯 시간 이상 북동쪽으로 가야하는 낙후된 시장 마을이었다. 웨슬리 시대에는 겨우 1,500 여명 정도 밖에 살지 않았고 지금도 전체 인구가 5천 명을 넘지 않는 소읍이다. 엡워쓰 사람들은 자기 마을이 낳은 세계적인 인물 웨슬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 보였다. 사무엘과 수산나 부부는 네 자녀들을 데리고 1696년 엡워쓰의 성 안드레 성당의 사제로 부임했다. 그 후 사무엘은 1735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39년 간을 엡워쓰에서 목회했다. 사무엘이 이곳에 왔을 때 엡워쓰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불학무식했으며 야만적이었다. 그러니 옥스퍼드 출신의 인텔리로서 야망에 부풀어 있었던 자칭 대시인이요 대학자인 사무엘과 맞을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엡워쓰는 퀘이커 교도들이나 침례교도들과 같이 국교회에 반감을 가진 비국교들의 세가 유달리 강한 곳이기도 했다. 국교도에 거의 맹신적인 충성심을 가졌으며 엄격한 규율가요 비타협적인 뚝심가이기도 했던 사무엘과 비국교들이 사사건건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1702년에 사제관이 부분적으로 불탔고 1709년 겨울 전소된 사건은 전부 다 사무엘에게 증오심을 품었던 비국교도들의 만행인 것으로 추정된다. 1709년 화재로 다섯 살 먹은 요한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져서 '불에 타다 남은 막대기'라는 별명을 얻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잿더미가 된 사제관은 약 400 파운드의 돈을 투자해서 1년 간에 걸쳐서 신축이 되었는데 웨슬리 일가가 이 집을 떠난 1735년부터 세계 감리교회 협의회에서 웨슬리 박물관으로 성역화 했던 1954년에 이르기까지 다른 후임 사제들의 거처로 계속 사용되었다. '옛 사제관'(Old Rectory)으로 불리는 웨슬리 생가는 거듭된 복구 작업으로 원형과는 다소 거리가 생기게 되었지만 그 옛날 웨슬리 대가족들의 생활 풍경을 연상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곳이었다. 사무엘이 주임 사제로 시무했던 성 안드레 성당은 오랜 풍상으로 많이 낡았지만 고즈넉한 기품만큼은 잃지 않고 있었다. 이 성당 안에서 가장 주목을 끌었던 것은 요한 웨슬리가 나이 여덟 살이 되어서 최초로 성찬을 분급받았을 때 사용했던 은으로 된 성배였다. 또한 16세기에 만든 제단이며 나무 의자, 헌금함으로 쓰였을지도 모르는 큰 나무 궤짝과 세례반 등이 역시 두드러지게 보였다. 사무엘은 시인으로서 대학자로서 목회자로서 웅대한 꿈을 가졌지만 그 꿈을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한 채 엡워쓰에서 눈을 감았으며 자신이 반평생을 섬겼던 성당 바로 곁에 묻혔다. 1742년 웨슬리가 엡워쓰를 방문했을 때 성 안드레 성당의 사제는 웨슬리에게 설교권을 거부해버렸다. 그리하여 웨슬리는 아버지의 무덤 위에서 옥외 설교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엡워쓰가 생긴 이래 최고의 인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사무엘의 무덤은 개인 소유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성당 측에서도 막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엡워쓰에는 웨슬리 기념교회가 하나 서 있었다. 1882년 웨슬리 감리교회 연맹 측은 엡워쓰에도 웨슬리 형제를 기념하는 교회가 세워져야 한다고 결의했다. 그 후 1888년부터 89년에 걸쳐서 6,500 파운드를 투자해서 웨슬리 기념 교회를 지었던 것이다. 웨슬리 기념 교회는 외부도 아름다웠지만 그 내부는 더욱 고상했다. 특히 제단 정면에 스테인드 글래스로 설치한 웨슬리 형제의 초상은 유리창을 통과하는 영롱한 햇빛과 더불어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연출했다. 성전 뒤쪽의 벽면에는 웨슬리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유명한 말 "이 세상에서 최고로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가 새겨진 배너가 걸려 있었다. 사진, 글 출처 (sola-gratia, 웨슬리 신학, 역사 연구원)
엡웟 최초 감리교회 (출처-http://cafe.daum.net/kchistory/9qYT/309)
<St Pancras Church, Wroot >
Wroot Beacon, sited near to the church
(출처-http://www.isleofaxholme.co.uk/islephotographs/wroot/newwrootphotographs.htm)
Wroot Beacon, sited near to the church
St Pancras Church, Wroot (출처-http://en.wikipedia.org/wiki/St_Pancras,_Wroot)
존 웨슬리 때의 이 교회 이름은 "The church of Wroote" 였고 현재는 St. Pancras Church 이다. 이 교회는 사무엘 목사님의 Fenland parish 교회 였고 존 웨슬리 목사님은 이곳에서1727-9까지 아버지를 도와 사역했다. 존 웨슬리가 준회원(deacon) 사제 안수를 받고 정회원(elder) 사제 안수를 받기 까지 1727-1929년에 목회하였던 루트(Wroot)교회(St. Pancras Church)는 허허벌판에 세워진 작은 교회이다. 현재도 작은 숫자의 성도가 예배를 드리고 월 2회(1, 3주) 성찬식을 하고있다.
St. Pancras Parish Church
(출처-http://www.isleofaxholme.co.uk/islephotographs/wroot/newwrootphotographs.htm)
St Pancras Church, Wroot
(출처-http://www.isleofaxholme.co.uk/islephotographs/wroot/newwrootphotographs.htm)
루트교회 내부
루트교회, 웨슬리 목사가 8살 때 부터 사용하던 성배
"Remember John Wesley", Wroot, near Epworth (출처-http://en.wikipedia.org/wiki/John_Wesley)
Wroot War Memorial
(출처-http://www.isleofaxholme.co.uk/islephotographs/wroot/newwrootphotographs.htm)
<Epworth John Wesley Memorial Methodist Church>
Epworth Wesley Memorial Methodist Church, 웨슬리 기념교회
(출처-http://cafe.daum.net/kchistory/9qYT/309)
웨슬리 기념교회
웨슬리 기념교회
웨슬리형제 기념교회 스테인드 글라스
1882년 웨슬리 감리교회 연맹 측은 엡워쓰에도 웨슬리 형제를 기념하는 교회가 세워져야 한다고 결의했다. 그 후 1888년부터 89년에 걸쳐서 6,500 파운드를 투자해서 웨슬리 기념 교회를 지었다. 웨슬리 기념 교회는 외부도 아름다웠지만 그 내부는 더욱 고상하다. 특히 제단 정면에 스테인드 글라스로 설치한 웨슬리 형제의 초상은 유리창을 통과하는 영롱한 햇빛과 더불어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성전 뒤쪽의 벽면에는 웨슬리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유명한 말 "이 세상에서 최고로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가 새겨진 배너가 걸려 있었다.
웨슬리형제 기념교회 성찬대
웨슬리형제 기념교회 성찬대
웨슬리형제 기념교회 성찬대
웨슬리형제 기념교회 창문
Window through Door, Epworth John Wesley Memorial Methodist Church
(출처-https://www.flickr.com/photos/7717902@N06/505936047/in/photostream/)
2003년 웨슬리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여 생가 인근에 세워진 기념 동상 (출처-http://cafe.daum.net/kchistory/9qYT/309)
웨슬리 생가로 가는 길에 존 웨슬리 탄생 300주년을 기념해 웨슬리기념교회가 중심이 되어 2003년에 세운 동상이 있는데 왼손엔 성경을 들고 오른손으로 제스처를 하면서 설교하는 모습이다. "Epworth: I still love beyond most places in the world." "I look upon all the world as my parish." "엡워쓰, 아직까지 세계의 그 어느 곳보다도 더 사랑하는 곳." 이란 웨슬리의 말이 새겨져있다. 웨슬리가 얼마나 고향을 사랑했는지, 선교적 열정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2003년 웨슬리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여 생가 인근에 세워진 기념 동상
탄생 300주년 기념 동상 기념문
웨슬리형제 기념교회 목사관
<St. Andre's Parish Church>
(출처-https://ramblingsfromredrose.wordpress.com/methodism-the-village-of-epworth-2-st-andrews-parish-church/)
사무엘 웨슬리가 39년 동안(1696-1735) 소천할 때까지 목회하던 세인트 안드레교회는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있었고, 오르막길은 좌우에 아름드리 가로수와 허리 높이의 가로등, 이름 모를 노란 꽃이 어우러진 호젓한 산책로 같았다. 13세기에 세워진 석조건축물에서는 중후함과 함께 오랜 풍상을 견디어낸 인내의 냄새가 풍겨났다. 예배당을 둘러친 안전망에 붙어있는 팻말과 건물 바로 옆에 즐비하게 늘어선 이끼 낀 묘비들이 풍기는 음산함은 이방인인 나에겐 낯설게만 느껴졌다. 3백 명쯤 앉을 수 있을 것 같은 예배실에는 서너 명의 인부들이 낡은 벽면을 뜯어내고 있었다. 어린 시절 존 웨슬리를 비롯한 사무엘의 자녀들이 세례를 받았던 팔각형 돌 세례반, 성례전을 위해 사용했다는 수산나의 의자, 벽 쪽에는 웨슬리와 관련된 내용과 웨슬리탄생 3백주년에 이곳에서 벌어졌던 행사들이 병풍처럼 전시돼 있었다. 웨슬리가 여덟 살이 되어 최초로 성찬을 분급 받았을 때 사용했다는 은으로 된 성배는 루트교회로 옮겨져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1696년, 바로 이곳에 사무엘과 수산나 부부는 네 자녀들을 데리고 부임하여 1735년 그의 나이 72세 때까지 무려 39년을 사제로 섬겼다. 반평생을 바친 교회, 웨슬리 가족에게 이 교회와 교구가 그렇게 매혹적이고 행복했었을까? 웹워쓰는 당시 성직자들에게 고약한 곳이었다. 사방이 강으로 둘러 싸여 마치 섬처럼 고립된 황량하고 소외된 시골마을이 웹워쓰였다. 대가족을 꾸리기엔 턱없이 부족한 박봉, 늘어만 가는 부채는 살림을 맡은 수산나의 애간장을 녹였다. 게다가 명문 옥스퍼드 대학을 나온 학자 사무엘과 웹워쓰 주민들과는 지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지만, 그것 이상으로 정치적인 입장에서 간격이 벌어져 있었다. 사무엘은 국교도를 지지한 반면 마을 사람들은 비국교도 성향을 지니고 있어 갈등이 빈발했다. 이 대립은 단순히 감정싸움 정도로 그치지 않고 무수한 적대행위로 표출되곤 했다. 사무엘은 자주 위협을 받았고, 가족들도 폭언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심지어 사무엘은 정치적 입장 차이가 근원에 있었지만, 표면적으로는 빚을 갚지 않는다는 이유로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1709년에 발생했던 목사관 대화재사건도 이들의 소행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일 정도다. 이만하면 진절머리를 치고 야반도주라도 할 상황이 아닐까. 샬프 대주교는 난폭하기 이를 데 없는 이곳 주민들을 잘 아는 터라, 이들을 치리하기 위해 다른 목회자를 파송할 요량으로 사무엘을 설득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고 한다. 도리어 사무엘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 이곳에서 뭔가 선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곳을 떠나는 것은 마치 적군의 화염이 저를 에워쌀 때 진지를 버리고 도망치는 겁쟁이와도 같은 일입니다"라고 회신을 보냈다고 하니, 오기에 가까운 그의 헌신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The path from the village leading to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