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교회 유산을 만나는 여행] (10) 윌리엄 캐리의 믿음과 선교 열정 영국 교회 흔들어 깨워

영국교회 유산을 만나는 여행] (10) 윌리엄 캐리의 믿음과 선교 열정 영국 교회 흔들어 깨워

디케DIKE 0 298
[영국교회 유산을 만나는 여행] (10) 윌리엄 캐리의 믿음과선교 열정 영국 교회 흔들어 깨워

윌리엄 캐리를 인도선교사로 파송한 케터링 풀러 침례교회

미국교회와 한국교회의 부흥은 영국 선교사들의 많은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중에서 존 로스와 윌리엄 캐리 선교사의 신앙유산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존 로스(John Ross, 1842-1915)는 스코틀랜드 서부 닉(Nigg) 출신의 장로교 선교사로서 중국 동북지방에서 사역하였고 심양의 동관교회를 설립하였으며 최초로 한국어 성경을 번역하였다.

1868년부터 선교사로 파송받기를 원했던 로스는 약 4년 정도 스코틀랜드 지방에서 사역하다가 해외 선교의 사명을 받아들여 1872년 3월 20일 목사 안수를 받고 중국으로 파송되었다.



8월 23일 중국 지푸항에 도착하였는데 중국어 공부를 시작한 지 5개월 만에 중국어 설교가 가능할 정도로 언어학습 능력이 탁월하였다.

황해도 송천리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는 1883년 5월 16일 서상륜, 서경조 형제에 의해 세워졌다.

서상륜은 영국성서공회에 의해 한국교회 역사상 최초의 권서인으로 임명되어 성경보급과 복음전파에 힘썼다. 그는 중국에서 로스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비록 로스 선교사가 한국땅을 밟은 적은 없지만 최초로 한글 성경을 번역하고 보급하여 개신교 신도들이 생겨났고 그가 전파한 장로교가 현재 한국 개신교에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존 로스와 사무엘 러더퍼드 등 19세기 스코틀랜드 부흥의 주역들이 공부했던 에딘버러의 뉴 칼리지(New College, 주소: Mound Pl, Edinburgh, Midlothian EH1 2LX)는 1910년 최초로 세계 선교대회를 개최했던 곳이다.

그 선교대회에 윤치호 선생을 대동하여 참석한 로스 선교사는 수많은 서양 선교사들에게 조선에 우수한 선교사를 파송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미 그때 조선은 공식적으로 사라진 나라였다. 필자가 지난 6월 뉴 칼리지를 방문했을 때는 대대적인 공사가 진행중이서 아쉽게도 출입할 수 없었고 아름다운 학교 정면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로스 선교사는 70세에 영국으로 돌아가 1915년 8월 6일에 숨을 거두었으며 에딘버러 뉴잉턴 묘지(Newington Cemetery, 주소: 222 Dalkeith Road Edinburgh)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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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딘버러 뉴잉턴의 존 로스 선교사 묘소와 필자


필자가 그의 묘를 찾아갔을 때, 한글성경완역 및 출간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성서공회에서 2010년 4월 11일에 헌정한 감사명패가 그의 무덤 앞에 있는 것을 보았다.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 1761-1834)는 1793년 인도에 선교사로 떠남으로 위대한 선교의 세기(The Great Century)를 연 현대선교의 아버지이다. 그는 1761년 영국 노스햄프톤(Northampton)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문맹률이 매우 높았는데 그는 공부에 대한 강한 욕구와 끈기로 글을 깨우쳤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구두수선공이 되었다.

19살 때, 한 기도모임에서 히브리서 13장 13절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위해 전 생애를 드리기로 헌신했다.

당시 영국교회는 선교는 예수님이 사도들에게만 주신 특별한 사명으로 국한시키며 식민지 사업과 관계가 없는 세계선교는 감히 생각지도 못했고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여겼다.

그와 같이 영국내적으로는 영적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세계선교에 대해선 관심조차 없을 때에 윌리엄 캐리의 마음은 세계를 품었다.

1792년 봄 그는 《이교도 개종에 대한 크리스천의 의무에 관한 연구》라는 책을 통해 세계선교는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해야 할 의무라는 사실과 그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였다. 당시 이 책은 《루터의 95조항》과 함께 베스트 셀러가 되어, 뜨거운 세계선교열풍을 전 유럽으로 확산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캐리는 늘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 그에게 감동과 도전을 받은 목사들이 새로운 선교회를 만들기로 합의하였는데 그것이 침례교 선교회(Baptist Missionary Society)였다.

캐리는 1787년부터 몰턴 캐리 침례교회(Moulton Carey Baptist Church, 주소: 34 West St, Moulton, Northampton NN3 7SB)에서 본격적인 설교자로 목회하며 선교사로서 훈련과 준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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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선교사로 선교의 세기를 연 윌리엄 캐리의 몰턴 캐리 침례교회와 그의 생가.왼쪽이 고상환 목사.


교회 바로 옆에 있는 그의 생가가 작은 박물관으로 남아 있다. 캐리는 1793년 3월에 케터링 풀러 침례교회(Kettering Fuller Baptist Church, 주소: 51 Gold Street, Kettering NN16 8JB)에서 파송받았다.

캐리가 인도 선교사로 가려 할 때, 그의 가족들과 많은 교인들은 완강히 반대했으나, 곧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되어 캐리는 가족 모두와 처제, 그리고 토마스라는 선교 동역자와 함께 인도로 향했다.

인도에서 그는 성경을 번역하고 여러 학교를 세우면서 복음의 빛을 비추었다. 캐리의 믿음과 선교의 뜨거운 열정은 18세기 영국교회를 흔들어 깨워 선교사를 파송하는 제사장 나라로 만들었고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세계선교의 불을 당기었다.

그는 임종의 순간 친구에게 "내가 죽었을 때, 캐리 박사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를 말게. 캐리 박사의 구주에 대해서 이야기하게"라고 말했으며, 1834년 73세의 일기로 그토록 사랑했고 헌신했던 인도 땅(Serampore, West Bengal)에 묻혔다.

이번 연재로 진리추구를 위하여 몸부림쳤던 영국 교회역사 탐방여행을 마치려 한다. 십자가 곁에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과 현재의 우리를 비교하면 우리의 타락과 부패를 쉽게 깨닫고 십자가로 방향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맡겨주신 지극히 작은 직분에도 충성하고 세상이 대가를 요구할 때에 기꺼이 헌신하는 것이 복음의 빚진 자로서 우리들에게 남겨진 과제임을 알았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그 동안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하고 싶다. 영국 교회역사 탐방을 위해 자료를 제공해 주신 김승진 교회역사 교수님, 기사를 점검해 주신 북가주 교회협의회 목사님들, 교정을 담당해 주신 이은한님, 안식년동안 동행하며 사진을 찍어준 아내와 기도해 주신 부모님과 가족, 안식년의 시간과 재정을 제공해 주시고 기도해 주신 교인들과 오늘도 소명에 따라 성실한 사역을 감당하시는 이민한인교회 모든 목회자들께 그 동안의 기사를 헌정하며 모든 영광 하나님께 돌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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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켓으로 변한 영국 교회. 오늘의 교회에 엄중한 경고를 주고있다.



<고상환 목사 (세계선교침례교회 담임, 게이트웨이신대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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