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교회 유산을 만나는 여행] (3) 개인과 사회, 전인 구원 지향의 구세군 1865년 태동

영국 교회 유산을 만나는 여행] (3) 개인과 사회, 전인 구원 지향의 구세군 1865년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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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교회 유산을 만나는 여행] (3) 개인과 사회, 전인 구원 지향의 구세군 1865년 태동

본격적인 구제와 복음사역을 위해 천막선교회가 시작된 공원

이번 영국 교회의 유산을 만나는 여행은 비전트립(Vision Trip)이었다. 비전트립은 단기선교도 해외여행도 아니다. 비전트립에는 내가 만든 꿈이 아닌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비전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기에 마땅히 보고 배워야 할 것들에 대하여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철저히 준비해야 했다. 필자가 넓은 세상에 관심을 갖고 젊은시절부터 해외여행을 하기 시작한 데에는 ‘영원한 나그네’, ‘세계여행 분야의 선구자’ 로 알려진 고 김찬삼 전 경희대 지리학과 교수님의 영향이 컸다.

그 분은 중고등학교 시절 은사로서 만날 때마다 생생한 해외여행담을 들려주셨고 그로 인하여 건강한 꿈을 품게 되었다. 그 열매 중에 하나가 영국교회 유산을 만나는 여행이다. 먼저 습득한 여행의 기본 노하우는 여행의 목적과 일정, 방문할 장소, 교통편과 예산 등에 대하여 미리 철저히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경우라도 여유를 가지고 그 상황에서 다른 최선의 방법을 찾는다. 지난 유럽 일정에서도 예약된 비행기들의 시간 변경과 취소, 악천후로 인한 장시간 지연 등이 있었으나 여유로운 대처로 당초 계획보다 좋은 비행일정과 혜택을 제공받았다.

[영국 교회 유산을 만나는 여행] (3) 개인과 사회, 전인 구원 지향의 구세군 1865년 태동

영국 Mile end Road에 있는 윌리엄 부스의 동상. 장례식에 15만명이 찾았다.



이제 오늘의 주제인 영국에서 부스의 흔적과 구세군 신앙의 발자취를 따라 가보자. 구세군은 1865년에 영국의 감리교 목사인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와 부인 캐서린 부스가 시작한 교회이다.

윌리엄 부스는 1829년 4월10일 영국 노팅햄(Nottingham)에서 가난한 사업가 사무엘 부스와 메리 모스의 2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감리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의 확신을 갖게 된다. 부친의 사업 실패와 별세로 인해 어린 나이에 생계를 위하여 노동을 하고 전당포에서 일해야 했지만 좋은 믿음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복음 전도에 힘썼다.

23세에는 토마스 쿡(Thomas Cook) 박사를 만나 신학수업을 받고 감리교회의 순회 전도자와 부흥사로 헌신한다. 그 무렵 아내 캐서린(Catherine)을 만나 검소한 결혼식을 하고 그 아낀 돈은 구제사역을 위해 썼으며 신혼여행 중에도 전도 집회를 인도하였다. 당시 영국 인구의 10%가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성공회와 감리교회는 사회현실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한 세기 전 감리교가 출범할 당시만 해도 사회정의를 위해 일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구제와 봉사활동들을 전개했었는데 이미 사회를 섬기는 활동이 미미해져 버린 것이다. 부스 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개인구원과 사회 구원을 포괄하는 전인 구원을 지향하는 구세군(Salvation Army)을 1865년에 시작한다.

구세군의 대사회적인 활동은 웨슬리의 성화 신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부스는 사회구원 없는 영혼구원은 비성서적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데 이웃이 당장 굶고 학대당하고 어려움에 처해 있는데도 영혼구원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옳지 않다고 믿었다.


이러한 성경적 가르침을 따라 웨슬리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거리로 나가 노숙자들, 주린 자들, 빈민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며 ‘이스트 런던 크리스쳔 미션’( East London Christian Mission)을 조직한다.

그 후 부스는 1878년에 선교회의 연례 보고서를 검토하다가, 보고서 윗부분에 쓰인 “기독교 선교회는 의용군(Volunteer Army)이다”라는 글귀에 대해 그의 아들 브람웰이 우리는 의용군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명령받은 군인들이라 하자는 말에 자원자(Volunteer)란 단어 대신 구원(Salvation)이란 글자를 써넣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구세군이란 이름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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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군의 사회 구원 실천을 통한 복음전도를 위해 끊임없는 노숙자 방문에도 도움을 주는 부스하우스



부스 하우스가 있는 런던 북동쪽의 화이트 채플(Whitechapel)역과 주변 대로인 마일 앤 로드(Mile End Road)는 윌리엄 부스와 구세군의 흔적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이다. 부스하우스(Booth House, 주소: 153-175 Whitechapel Road, London E1 1DN)는 노숙자들과 빈민들을 위한 구제 활동을 가장 큰 규모로 하는 곳인데 이곳을 방문할 당시에 노숙자들이 도움을 얻고자 끊임없이 찾아오고 있었다.

구세군의 모토인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Heart to God, Hand to Man)’의 실천현장을 목격했다. 화이트채플 지하철역에서 한 블록 동쪽에 블라인드 베가 선술집(The Blind Beggar Pub)이 있는데 이곳에서 부스는 비전을 품게 된다. 술집은 항상 술과 폭력, 마약, 창녀들로 넘쳐나는 곳이다.

윌리엄 부스는 이 술집 앞에서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 설교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켜 그의 말씀을 듣고 회심한 사람들이 모여서 구세군 모임이 형성되고 구제와 섬김의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화이트채플 역에서 북서쪽으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한 발렌스 가든스(Vallance Gardens)라는 작은 공원이 바로 본격적인 구제와 복음 사역을 위해 천막 선교회(The Tent)가 운영된 곳이다. 그러나 현재 그곳에는 부스를 기념할 만한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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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부스가 사역의 비전을 발견한 선술집



블라인드 베가 선술집에서 마일 앤 로드(Mile End Road)를 따라 동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윌리엄 부스 흉상이 나오고 이어서 부스 부부의 입상이 나온다. 그 거리 일대가 윌리엄 부스와 구세군의 핵심 사역지였다.

1880년부터 그의 사역은 전 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하였고 복음 전도를 위해 당시 교회가 돌보지 않던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사역에 헌신함으로써 그 결과 오늘날 기독교 내 가장 강력한 사회적 돌봄 사역을 진행하는 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언제나 복음 전도를 통한 영혼 구원이었다. 83세에 부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 15만 명이 그의 장례식장을 방문했고 마지막 천국 환송예배에는 메리(Queen Mary) 영국여왕을 위시한 4만 여명이 참여하였다.

영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믿음의 선한 영향력을 끼쳤던 윌리엄 부스는 아브니 파크(Abney Park Trust)에 아내와 함께 잠들어 있다.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상처받은 자를 끌어안았으며, 찢긴 자들을 감싸 주시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평생 사랑의 삶을 실천한 윌리엄 부스를 오늘날 교회는 진정으로 주목하고 따라야 한다. <계속>

<고상환 목사/세계선교침례교회 담임. 게이트웨이 신학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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