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웨슬리와 감리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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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웨슬리(John Wesley)는 1703년 6월 28일에 영국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고 할아버지도 목사였고 증조할아버지도 목사였다. 이런 집안에서 19명의 자녀 중에 15번째 아이요 아들로는 두 번째로 태어났지만 그의 가정은 많은 자녀들로 인하여 항상 빈곤에 시달렸다. 어느 해에는 통틀어 6실링밖에 없는 판국에 쌍둥이가 태어나기도 하였다.
웨슬리가 태어난 영국은 당시 국교도, 즉 지금의 성공회와 청교도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뒤숭숭하였고 게다가 산업혁명이 끼친 사회혼란 등으로 술 취함, 싸움질, 도박, 도적질, 자살 등이 마치 전염병처럼 퍼지게 되었다. 신앙은 도리어 미신처럼 여겨지고 각처에서 웃음거리가 되었다. 심지어 교회의 지도자들까지도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도리어 사람들에게서 재물을 빼앗아다가 자기들 배를 채우는 일에만 바빴다. 시대는 희망이 안보이고 더욱 암울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복음진리를 전파할 시대의 등불로 요한 웨슬리를 예비하고 준비시키고 계셨다.
요한 웨슬리는 신앙심이 많았던 어머니 수잔나 부인에게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요한 웨슬리는 10살 때 런던에 있던 챠더 하우스 학교에 입학하였지만 갑자기 엄격하게 다스리면서 가르쳐주셨던 부모님이 안 계시자 자연히 신앙생활이 게을러지게 되었다. 이때가 그의 생애 중에 가장 신앙적으로 잠들어 있던 시기였다고 그는 후에 고백하였다. 어쨌든 그는 차터 하우스에 들어갈 때는 성자였으나 나올 때는 시커먼 죄인이 되어 있었다.
1720년 초여름, 웨슬리는 챠터 하우스 학교를 마치고 옥스퍼드 대학교에 들어갔다 그 때에도 그는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뜻밖에 숨이 막힐 지경으로 코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얼마 후에는 목구멍에서 직접 입으로 피를 토하기도 하였다. 이런 일이 밤마다 계속되다시피 하였다. 그는 이렇게 육신이 쇠약해진데다가 극심한 궁핍을 겪는 동안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를 깨닫고 아버지처럼 훌륭한 목사가 되겠다는 그의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 회개하고 목사가 되고자 결단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하루 2시간씩 구별하여 열심히 기도하였고 영적인 진보와 실천적인 삶을 위해 나름대로 20가지의 규칙을 정해 놓고 투쟁하였다. 22세의 나이로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3년 후 마침내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다. 이날 웨슬리는 너무나 감격하여 눈물을 쏟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요한 웨슬리의 설교는 신통치 않았다.
설교 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사람이 많았다. 이후 잠시 아버지 사무엘 목사를 대신하여 고향에서 설교하였는데 그의 설교는 역시 신통치 못하여 신자들은 또 졸기 시작하였다. 이때 옥스퍼드에서 공부하고 있던 동생 찰스 웨슬리는 신앙이 뜨거워져 매 주일 한 번씩 몇몇 친구들을 모아 놓고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후 동생의 요청으로 요한 웨슬리가 이 모임을 주관하게 되었고 날로 성장해 갔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학교 안에 쫙 퍼져 나갔다. “우리 대학교 안에 불이 붙었다, 성경 말씀을 글자 그대로 실천하는 학생들이 생겨났다. 그들이야말로 메서디스트들이다.”
메서디스트(methodist)는 감리교도라는 뜻으로 요한 웨슬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것들을 그대로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하여 오늘의 감리교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의 모임은 ‘거룩한 클럽’이라 불렸는데 한결같이 기도와 성경공부 그리고 구제에 헌신하였다.
얼마 후 버튼 박사의 추천으로 요한 웨슬리는 동생과 거룩한 클럽 회원인 벤자민 잉헴과 함께 1735년 10월 18일 미국을 향하여 그레이브 샌드 항구를 출발하였다. 이때 요한 웨슬리는 일생에 또 한 번 큰 변화를 겪게 되는 사건을 만나게 되었다. 시몬즈 호가 넓은 대서양을 가로질러 가던 어느 날이었다.
“앗, 태풍이다!”, “쏴 - 꽈르릉 꽈당, 꽝!” 캄캄한 밤, 순식간에 배는 하늘이 터진 듯한 소낙비와 무서운 파도 속에서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이곳저곳에서 거센 파도 소리를 뚫고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젠 상어 밥이 되는구나.’ 웨슬리도 어느새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때 어디선가 은은하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찬송을 듣는 웨슬리는 너무나 놀랐고 충격 그 자체였다. 그들은 모라비안 성도들이었다.
이를 통해 웨슬리는 자신이 삶 속에서 진정으로 주님의 구원을 믿지 못함을 깨달았다. 57일 간의 항해를 마치고 미국 대륙에 도착하여 목회를 시작하였지만 한 부도덕한 여인의 모함을 계기로 미국에서의 사역에 종지부를 찍고 2년 만에 영국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는 이 모든 사건을 통해 아주 겸손하게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모라비안교의 지도자 피터 볼러로부터 도움을 받아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를 깊이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이후 1738년 그는 ‘올더스게이트 사건’이라 불리는 가슴이 타오르는 뜨거운 거듭남의 체험을 하고 이때부터 무서운 열심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맨 처음 설교는 옥스퍼드 대학생들 앞에서 하였다. “확실한 믿음으로 완전한 구원을 받는다.”이것이 설교 내용의 전부였다. 사람들은 가슴을 움켜잡고 데굴데굴 구르며 회개하였다. 뉴게이트의 감옥에서도 ‘거저 주시는 구원’이라는 제목으로 수많은 죄수 앞에서 설교하였다. 웨슬리가 크게 믿음의 구원을 외치자 여기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데굴데굴 굴렀다. 그의 말은 칼날처럼 사람들의 가슴에 박혀들고 많은 나무를 태우는 뜨거운 불길과 같았다.
그러자 대부분의 목사들이 웨슬리에게 비웃으며 ‘구원이 믿음으로만 된다면 교회 제도나 성찬식은 쓸 데 없는가’라고 반문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요한 웨슬리를 비방하는 근본 이유는 실제 요한 웨슬리가 교회의 사치와 목사들의 타락을 사정없이 후려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모든 교회는 요한 웨슬리에게 교회 안에서의 설교를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더 큰 성령의 역사가 있게 되었다. 친구 화이트필드의 도움으로 그는 킹스우드 지방 광부들에게 교회 대신 넓은 언덕에서 즉석 설교를 하였다. 그의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 그대로 불덩어리였다. 막혔던 화산이 터져 오르듯이 그의 입에선 불덩어리가 뿜어 나왔다. 처음 모인 사람들이 200명 정도 밖에 안 되었는데 다섯 번째 설교할 때는 그곳에 1만 명이 훨씬 넘었고 다음엔 1만 8천명이 몰려왔다.
그때부터 말씀에 굶주린 사람들이 설교를 사방에서 요청해 왔다. 어떤 지방에서는 2만 명이 넘는 숫자가 가득 집회장을 메우기도 하였고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홍수를 이루었다. 1739년 11월 11일 그는 낯선 두 신사의 기증으로 대포공장을 개조하여 훌륭한 예배당을 만들었다. 사람을 죽이는 대포를 만드는 공장을 사람을 살리는 대포를 만드는 공장으로 만들어 이곳을 중심으로 감리교단이 성장하였다.
모이는 사람이 점점 늘자 웨슬리는 그 많은 사람을 다 돌볼 수 없어 구역마다 속회라는 것을 조직하여 일을 나누어 맡겼다. 이런 조직적인 체계를 이루자 그 후에는 사람이 아무리 늘어도 빈틈없이 착착 모임이 커가게 되었고 이 무렵 비로소 감리교도라는 말을 정식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요한 웨슬리는 감리교도를 이끌며 무엇보다도 신자들에게 예수님과 같은 사랑의 실천을 가르치며 설교하였다. 모임이 더욱 커지자 국교회에서는 깡패를 동원하여 핍박을 본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모임이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웨슬리를 납치한 깡패들은 “이 자식! 너 말씀 전할래, 안 전할래”라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말씀을 전함으로 그들을 변화시켰다.
또한 “나의 교구는 전 세계요, 세계는 나의 일터다”라고 외치며 세계 선교를 위해 기도하였고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단 한 사람만 남아있더라도 나는 그 사람을 위하여 땅 끝까지 달려갈 것이다”라고 자신을 채찍질하였다.
1753년 그는 직접 발 벗고 세계 선교에 뛰어들기 시작하였다. 맨 먼저 와이트 섬으로 가서 전도운동을 벌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다음으로 아일랜드에 갔다. 국교파 신자들이 모조리 나서서 난리를 치기도 하였지만 그의 설교는 아일랜드 전체를 복음의 물결로 뒤덮이게 하였다. 스코틀랜드에 가서도 무뚝뚝하게 듣던 그들이 웨슬리의 설교를 사랑하게 되었다. 글래스고우와 아버딘, 그리고 더딘을 이어 웨슬리는 계속하여 웨일즈, 카아디프 그리고 리메리크까지 널리 복음을 전하였다.
요한 웨슬리, 그는 왜소하였지만 그처럼 작은 몸 안에 세계를 흔드는 힘이 들어있었다. 요한 웨슬리는 전도하기 위하여 50년 동안 말을 타고서 지구 10바퀴 이상 되는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 틈에 2백 권이 훨씬 넘는 책을 펴냈다. 50이 넘은 나이에도 하루 평균 32km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60년 동안 한 번도 걸러본 적이 없이 새벽 4시면 일어나 기도하고 설교하였고 동생과 만든 수많은 찬송가 중에 1778년에는 좋은 것만 뽑아 525곡의 커다란 찬송가를 만들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성경이 만든 사람’이라고 하였다. 정말 요한 웨슬리는 성경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80세가 되었을 무렵 그가 전도를 다닌 곳마다 어느새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86세의 나이에 자신을 핍박했던 아일랜드 콘웰에서 2만 5천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하기도 하였다. 그는 말년일지라도 자신에게 남은 한순간 한순간을 쓸모없이 살아가지 않고자 촌음을 아껴서 복음 전파에 힘을 기울였다.
그가 쇠약하여 죽기 5일전 까지도 그는 32km 떨어진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할 정도였다. 그가 89세의 나이로 죽을 때 두 개의 숟가락과 하나의 찻주전자, 그리고 다 낡아빠진 코트 한 벌 밖에 없을 정도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나누어주었다.
그의 임종을 안타까워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웨슬리는 평안한 가운데 멀고 먼 인생의 길을 다 마치고 천국의 영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웨슬리가 세상을 떠날 당시, 영국에는 294명의 설교자와 71,668명의 회원이 있었으며 선교부에는 19명의 선교사와 5300명의 회원이 있었고 미국에는 198명의 설교자와 43,265명의 회원을 가질 만큼 그의 인생은 큰 열매를 맺게 되었다.
[출처] 요한 웨슬리와 감리교|작성자 한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