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종교 개혁 현장을 가다] (9) 종교개혁은 ‘부패한 중세교회 부정,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신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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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텐베르크는 1517년 루터가 95개조 반박문 걸었던 종교개혁의 중심지

▶ 독일 곳곳서 루터의 숨결 고뇌 느껴. 오늘의 교회도 성경적인지 성찰 필요

[독일의 종교 개혁 현장을 가다] (9) 종교개혁은 ‘부패한 중세교회 부정,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신앙운동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축제가 한창인 아이제나흐지역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궁성교회 문에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면서 본격적인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으니 오는 10월 31일로 500주년이 된다. 오늘은 영국교회 유산을 만나는 여행 대신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독일 종교개혁지를 소개한다.

1517년까지 로마 가톨릭교회는 중세 유럽 사람들의 삶을 종교적, 사회적으로 지배하였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제의 개입 없이 단독으로 일반 성도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런 제도화되고 교권화된 중세 교회 상황 가운데서도 개혁을 가능케하는 변화들이 생겨났다.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인 간접원인과 종교적인 직접원인들이 있었다.

간접적인 원인으로는 첫째,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으로 인해 중세사람들의 세계관이 넓어지는 지리적 변화가 있었다. 둘째,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 봉건주의가 무너지고 사회개혁을 요구하는 경제, 사회적 변화가 있었다. 셋째, 유럽 여러국가에 절대 왕조들이 등장하고 왕권이 강화됨으로 자국의 힘과 재정이 교황청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며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정치적인 변화가 있었다. 넷째, 초대 교부들의 믿음으로 돌아가자는 문예부흥(Renaissance)과 성경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찾는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와 종교개혁 사상을 신속히 파급시켜 준 인쇄기술의 발달과 같은 문화적인 변화가 있었다.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주요 원인으로는 첫째, 일반 성도들이 성경을 소유하거나 읽을 수가 없어 진리에 대해 무지한데다 성물과 같은 우상숭배를 하고 있음을 종교개혁자들이 보았다. 둘째, 교회의 만연된 재정적 부패 및 성직자들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셋째, 면죄부 판매, 특히 마인즈의 대주교인 Albrecht von Brandenburg(1490-1545)가 교황 레오 10세와의 협상 하에서 자신의 교구에서 면죄부를 독점 판매하도록 한 것이 루터를 자극하여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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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당시 면죄부를 위한 헌금함



루터의 종교개혁지를 찾아가는 가장 좋은 방안은 루터가도(Luther Strasse)라 불리는 보름스부터 비텐베르크까지 이어진 가도를 따라가는 것이다. 보름스는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 때 ‘이단자’ 루터가 소환된 곳이며 비텐베르크는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걸던 종교개혁의 중심지이다.

보름스로부터 비텐베르크까지는 루터의 출생지, 성장지, 사망지, 학창 시절을 보낸 곳, 회심한 곳, 수도사로 있었던 곳,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한 곳 등을 지나게 된다. 개혁자 루터의 숨결, 고뇌를 느끼며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치던 현장들을 밟아 볼 수 있다.

이번 글은 루터가도의 남쪽 보름스에서 시작하여 북쪽 비텐베르크의 여정으로 소개한다.

보름스(Worms)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남서쪽으로 45마일 떨어져 있으며 종교재판이 있었던 보름스 대성당(Wormser Dom, 주소: Domplatz, 67547 Worms)이 있는 곳이다. 종교개혁과 관련하여 가장 위협적이었던 1521년 루터의 소환과 정죄와 파문을 위한 절차를 밟았던 곳이다.

루터가 출두한 정확한 지점이 대성당 북쪽 하일스호프 공원(Heylshofgarten)에 표지석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서 루터가 외쳤던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을 묵상하니 가슴이 뭉쿨해졌다.


근처에는 세계최대의 종교개혁 기념비가 있다. 루터의 입상을 중심으로 페트뤼스 발데스(Petrus Waldus), 존 위클리프(John Wyclif) , 얀 후스(John Huss),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의 좌상이 있다. 이것으로 루터가 이 네 사람의 신앙을 이어받았다는 것과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에 그보다 앞선 개혁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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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박물관 소장,보름스의 종교재판 받는 루터.



보름스에서 북동쪽으로 160마일 떨어진 아이제나흐(Eisenach)에는 바르트부르크 성(Schloss Wartburg, 주소: Auf der Wartburg 1)이 있다. 1521년 보름스에서 파문당한 루터가 선제후에 의해 약 1년간 숨어 지내며 독일어로 신약성경을 번역한 곳이다. 아이제나흐에서 동쪽으로 44마일 떨어진 에르푸르트(Erfurt)에는 루터가 1505년부터 1511년까지 수도사로 있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Augustinerkloster, 주소: Augustinerstraße 10)이 있다.

도시 외곽에는 함께 걷던 친구가 벼락에 맞아 즉사하는 사고를 목격한 후에 수도사로 서원함을 기념한 스토테른하임의 루터기념돌(Der Lutherstein bei Stotternheim)이 있다. 에르푸르트에서 북동쪽으로 55마일 떨어진 아이슬레벤(Eisleben)은 루터가 태어난 곳이다.

이곳에는 유아세례 교회, 마지막 설교 교회, 임종을 맞은 집(Luthers Sterbehaus), 그리고 1483년 11월 10일 루터가 태어난 루터 생가(Luthers Geburtshaus, 주소: Lutherstraße 14-17)가 있다. 아이슬레벤에서 북쪽으로 13마일 떨어진 만스펠트(Mansfeld)에는 어린 시절을 보내며 초등교육을 받고 자랐던 루터의 집(Lutherhaus)과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한 루터 동상이 있다.

만스펠트에서 동북쪽 73마일 떨어진 비텐베르크(Wittenberg)는 95개조 반박문을 내건 곳으로 반드시 가보아야 할 종교개혁의 시작과 중심인 곳이다. 이 도시의 Collegienstraße 길을 따라 루터 박물관과 루터하우스(Luterhalle, 주소: Collegienstraße 54), 비텐베르크 대학교수로 재직했던 건물인 로이코레아(Leucorea), 루터의 개혁을 가장 많이 도운 멜란히톤의 집(Melanchthonhuas), 담임을 했고 첫 개신교 예배를 드린 성 마리엔 교회와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역사적인 장소인 궁성교회(Schlosskirche, 주소: Collegienstraße 1)가 있다.

[독일의 종교 개혁 현장을 가다] (9) 종교개혁은 ‘부패한 중세교회 부정,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신앙운동

비텐베르크 시청광장에 루터와 멜란히톤의 입상이 서있다



교회 내부에도 종교개혁의 흔적들이 있고, 오른쪽 설교단 밑에는 루터의 무덤이, 반대편에는 멜란히톤의 무덤이 있다. 종교개혁은 부패한 중세교회를 부정하고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란 기치아래 초대교회의 참된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한 신앙운동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에도 종교개혁의 유산을 따라 잘못된 전통과 권위가 사라지고, 성경중심적인 신앙과 생활이 교회 안에 회복되어 잘 유지되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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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1517년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었던 독일 비텐베르크 궁성교회 정문.필자가 서있다.



<고상환 목사 (세계선교침례교회 담임, 게이트웨이신대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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