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교회 유산을 만나는 여행] (2) 개신교의 뿌리인 웨슬리 흔적과 감리교 신앙 유산 탐방
웨슬리 형제의 회심장소 올더스 게이트서 감리교 태동
웨슬리는 사회변혁 정의 구현보다 죄 사함과 회개 촉구
중세 로마가톨릭을 비판하고 그로부터 분리됐을 때만 해도 프로테스탄트는 하나인 것 같았으나 이내 감리교, 침례교, 구세군 등 다양한 교파로 나뉘어졌다. 필자는 이 다양한 개신교 교파의 뿌리인 영국에서 웨슬리의 흔적과 와 감리교 신앙 유산을 찾아갔다.
존 웨슬리(John Wesley)는 감리교의 창시자이다. 그는 국교회 목사인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와 어머니 수잔나의 열 다섯 번 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신앙적 영향을 받고 자랐으며 25세에는 영국 국교회로부터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 (Charles Wesley)는 열 아홉 형제 중 열 여덟 번 째로 태어나 평생 그의 형 존 웨슬리의 곁에서 묵묵히 사역하여 종종 ‘잊혀진 웨슬리’로 불리워진다.
하지만 영국의 감리교 부흥을 견인한 것은 존 웨슬리의 설교와 찰스 웨슬리의 찬송이란 말이 있을 만큼 찰스 웨슬리의 영향은 컸다.
찰스 웨슬리는 무려 8,989개의 찬송을 지었으며 현재 새찬송가에 수록된 대표적인 그의 찬송시들은 만입이 내게 있으면(23장)을 비롯하여 15, 22, 34, 105, 126, 164, 170, 174, 280, 388, 595장 등이 있다.
필자는 런던에서 북쪽으로 175마일 떨어진 웨슬리의 고향인 엡워스(Epworth)에서 18세기 감리교 운동의 두 기둥인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의 어린시절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웨슬리의 생가인 올드 렉토리( Old Rectory 주소: 1 Rectory Street, Epworth, DN9 1HX)와 두 형제가 회심후에 야외설교를 했던 장소인 The Market Cross, 웨슬리 기념교회, 사제견습을 했던 루트 교회와 세인트 앤드류 교회 등 많은 웨슬리의 유적을 만날 수 있었다.
런던에서 서북쪽으로 약 60마일 떨어진 옥스포드대학에서는 감리교의 여명을 느낄 수 있다. 존과 찰스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한 후, 찰스 웨슬리가 몇몇 믿음의 친구들과 신성클럽(holy club)을 창립하였고, 존 웨슬리는 나중에 조인하였으나 그의 탁월한 리더십 때문에 곧 신성클럽을 이끄는 사람이 되었다.
웨슬리는 초대교회를 모델로 신학을 연구하는 한편 자선과 구제사업에 힘썼다. 웨슬리의 가르침을 따라 일상생활에서 규칙적인 금식과 구제 기도 등 영성생활을 하는 이들을 ‘규칙주의자(Methodist)’로 불렸고, 이 명칭이 교단명이 됐다. 웨슬리 형제가 회심한 곳은 런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Street)에 있는데 그곳에서 감리교가 태동하였다.
존 웨슬리의 정확한 회심 위치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현재 올더스게이트의 런던 박물관 앞에 그의 회심을 기념하여 ‘성령의 바람’을 상징한 청동기념비가 있다.
그 근처에 찰스 웨슬리의 회심장소인 존 브레이 하우스(John Bray’s House, 주소: Little Britain 12)가 있고 집 문 위에는 찰스 웨슬리의 회심을 기념하는 기념명패가 붙어 있다.
런던 페터레인(Fetter Lane)은 웨슬리가 성령의 능력을 입은 곳이다. 웨슬리 형제는 1739년 페터레인 모라비안 형제단의 기도회에 참석하여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위대한 사역을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회심하고 성령 체험을 한 것이 모두 모라비안 교도들을 통해서였다. 필자가 독일의 헤른후트의 모라비안 마을에서 웨슬리의 흔적을 볼 수 있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페터레인에 있던 모라비안 교도 예배처소는 2차 대전 당시 폭격으로 파괴되어 당시 교회가 있었던 자리에는 명판만 남아 있다. 그러나 1960년대에 첼시에 페터레인 모라비안 교회(Moravian Church 주소: 381 King’s Road, Chelsea, London SW10 0LP)가 다시 세워졌다.
교회역사가는 웨슬리의 페터레인 성령 체험을 웨슬리 부흥운동의 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그후 웨슬리는 런던 시티로드(City Rd)에 1778년 새로운 예배당을 짓고 뉴 채플이라고 불렀는데 그곳이 지금의 웨슬리 채플(Westley Chapel, 주소: 49 City Road, London, EC1Y 1AU)이다.
그 곳에는 감리교 박물관과 웨슬리 하우스도 있다. 정문에는 존 웨슬리 동상이 있는데 그 아래에는 그의 명언 중에 하나인 “전 세계가 나의 교구”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그는 1791년 88세를 일기로 영적 부흥의 불길을 남긴 채 천국으로 떠났고 웨슬리 예배당의 뒤편에 그의 무덤이 있다.
웨슬리 하우스에는 작은 탁자와 무릎 받침대가 놓인 웨슬리의 작은 기도실이 ‘능력의 방(power room)’이라는 별명으로 있다. 웨슬리 형제들의 어머니 수잔나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생가는 웨슬리 채플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고 현재는 벽에 수잔나를 기리는 명판만 남아 있다. 수잔나는 1669년에 스물 다섯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고 사무엘 웨슬리를 만나 열 아홉 남매를 낳았으나 그중 여덟 명만 생존했다.
사회 하층민들에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웨슬리의 메시지와 감리교 부흥운동은 사회 변혁과 정의 구현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죄 사함과 회개를 촉구했다. 웨슬리가 세상을 떠날 무렵, 바다 건너 프랑스에서는 대혁명이 진행 중이었다.
18세기 영국은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사회 양극화 현상, 실업과 가난, 정복 전쟁 등을 겪으며 사회 구조적으로 프랑스보다 민중 봉기가 일어날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러나 웨슬리로부터 시작된 부흥의 물결이 영국에서 프랑스 혁명과 같은 폭동이 발생하지 않도록 저지하는 가장 큰 힘이었음을 웨슬리의 기도의 방에서 그 영향력의 비밀을 알 것 같았다.
감리교 교파가 생겨나던 당시의 상황은 진리를 지키며 생명을 살리려는 목숨 건 몸부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구령의 열정을 불태웠음을 웨슬리의 신앙유산을 밟으며 더욱 깨달았다. 초기 감리교 부흥운동의 열매로써 말씀을 들은 군중들이 눈물로서 회개하였고, 도박, 술, 싸움, 매춘의 범죄가 감소했다. 실제로 웨슬리 시대의 감리교도들에게는 담보 없이도 돈을 빌려 주었다 하니 그 사회적 영향력이 어떠했는지 익히 알 수 있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은 진정성 담긴 믿음의 실천을 통해 사회로부터 인정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한다.<계속>
<고상환 목사 /세계선교침례교회 담임, 게이트웨이신대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