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의 회심기념비(commemorating the place of John Wesley, christ church college)[2]

존 웨슬리의 회심기념비(commemorating the place of John Wesley, christ church c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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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중반에 참회왕 에드워드가 세운 것으로 중후한 1쌍의 탑이 우똑 솟아 있는 고딕 양식이다.  서쪽 정면은 18세기에 개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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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사원          (출처- http://blog.daum.net/seoulpr7555/690)

 

왕실의 교회로 유명한 이 사원안에 존과 촬스웨슬리의 기념비가 있다. 감리교의 창시자에 대한 영국인들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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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형제 기념비, 웨스트민스터 사원, 원안의 사진은 왼쪽은 촬스웨슬리 오른쪽이 존 웨슬리이다

아래 사진은 존 웨슬리가 아버지 사무엘웨슬리의 무덤위에서 설교하는 장면이다

 

웨스트민스터의 사원에는 웨슬리 형제를 위해 세워진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에는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가 말한 세가지 명언이 기록되어있다. 기념비의 내용은 (존 웨슬리, 1703.6.17 출생, 1771.3.2 사망, 촬스 웨슬리, 1707.12.18 출생, 1788.3.29 사망, 첫 번째 명언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두 번째 명언  "세계는 나의 교구다 (I look upon all the world as my parish)"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은 땅에 묻으시나 당신의 일은 계속해 나가신다 (God buries His workmen, but carries on His work)" ) (사진 출처- 기독교세계, 감리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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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폴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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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폴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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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울 대성당 건물 정면에서 왼쪽에는 교회마당과 정원이 뒤로 연결이 되는데 바로 이곳에 동상이 서있다. 이 동상은 감리교 센트럴 홀에 있는 19세기 초에 만들어진 동상을 복제해서 만든 것으로 1988년에 세워졌다.  (출처- "웨슬리 스토리"  조선석 피기영 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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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메리교회, 웨슬리가 설교하던 곳, (출처- http://blog.naver.com/sophial020/3016917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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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메리교회, 웨슬리가 설교하던 곳, (출처- http://blog.naver.com/lylyly7/150153109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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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메리교회, 웨슬리가 설교하던 곳, (출처- http://blog.naver.com/ksi3876/5013223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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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메리교회, 웨슬리가 설교하던 곳, (출처- http://blog.naver.com/sophial020/3016917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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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메리교회, 웨슬리가 설교하던 곳, (출처- http://blog.naver.com/monkey3491/140144123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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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메리교회, 웨슬리가 설교하던 곳, (출처- http://blog.naver.com/monkey3491/140144123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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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메리교회, 웨슬리가 설교하던 곳, (출처- http://blog.naver.com/sophial020/3016917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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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메리교회, 웨슬리가 설교하던 곳, (출처- http://blog.naver.com/sophial020/3016917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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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메리교회, 웨슬리가 설교하던 곳, (출처- http://blog.naver.com/sophial020/3016917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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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메리교회, 웨슬리가 설교하던 곳, (출처- http://blog.naver.com/sophial020/3016917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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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메리교회, 웨슬리가 설교하던 강단


존 웨슬리는 옥스퍼드의 펠로우로 있는 동안 교수와 학생을 대상으로 몇 차례 이곳에서 명설교를 했다.  존 웨슬리는 66년이라는 공식사역기간동안 무려 4만회의 설교를 했고 하는데, 간단히 계산해 보아도 하루 평균 2회 이상의 설교를 한 셈이다. 그의 무수한 설교 가운데 가히 명설교로 꼽히는 몇 편의 설교가 바로 이곳, 세인트메리교회에서 교수와 학생들, 졸업생들 앞에서 선포됐다. 특히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Salvation by Faith)이라는 설교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데, 구원의 믿음에 대한 부족함을 절감하고 낙심했던 웨슬리가 고민 끝에 찾은 해답이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1738년 3월 4일 일기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설교를 그만 두어라. 너 자신이 믿음이 없으면서 누구에게 설교를 할 수 있느냐?”라는 마음의 소리에 가책을 느끼며 설교를 그만 두어야 할지 아닌지에 대해 뵐러에게 묻는다. 뵐러는 의기소침해 있는 웨슬리에게 대답한다. “믿음을 갖게 되기까지 믿음에 관하여 설교를 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믿음이 생기면 그 믿음에 관하여 설교를 하십시오”라고. 이후 웨슬리의 관심은 믿음과 구원의 관계에 집중되었을 것이다. 두 달이 지난 5월 24일 웨슬리는 올더스게잇에서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다는 강한 확신과 회심을 경험한다. 이런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난 웨슬리는 에베소서 2장 8절(‘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을 본문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해 공식적(?)으로 선포한다. 이후 그의 몇몇 설교는 대학에서 논란거리가 됐다. 웨슬리의 8월 24일자 일기를 펼쳐보면, ‘성 마리아 교회에서 설교했다. 아마도 이것이 최후였을 것이다..... 나는 나의 소신을 유감없이 피력했다. 대학의 소사가 와서 부총장께서 나의 설교노트를 보기 원한다고 하기에 하나님의 현명하신 섭리를 찬미하면서 지체 없이 노트를 보냈다’라며, 자신의 설교에 대한 주위의 비판적 정황을 묘사하고 있다. 웨슬리는 대학교회에서 여러차례 설교할 기회를 얻었을 만큼 뛰어난 설교자였다. 하지만 이번 설교는 오직 자신들의 의를 내세우고, 형식적이고 믿음 없는 이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었다. 참석했던 교수들은 이를 문제 삼아 웨슬리가 대학교회의 설교단에 서지 못하게 한다. 무엇이 그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을까? 궁금하다면 웨슬리의 대표적인 설교 53편을 묶어 펴낸 [표준설교집]을 열어보시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90프로 크리스찬’ ‘신앙에 의한 의인’... 존 웨슬리가 성서에서 찾아낸 하늘가는 길을 한번쯤 진지하게 함께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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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형제가 설교했다는 내용의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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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메리교회, 웨슬리가 설교하던 곳, (출처- http://blog.naver.com/monkey3491/140144123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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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메리교회, 웨슬리가 설교하던 곳, (출처- http://blog.naver.com/monkey3491/140144123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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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매리교회 유리문

 

St. Mary Church에는 존 웨슬리 300주년기념으로 예배당 현관문(유리문)을 존 웨슬리의 예배당(John Wesley's Chaple)이란 글씨가 새겨진 문을 만들어 달았다. 사실 웨슬리의 마지막 설교가 "옥스퍼드 위선자"였음에도 이 채플이름을 웨슬리 예배당으로 만든 것을 보면서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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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차터하우스          (출처- http://blog.naver.com/actslim/100091718082)

 

존 웨슬리가 몸담은 수도원은 카르투지오수도회가 런던에 세운 차터하우스 스쿨(Charter House School)이다. ‘차터하우스’는 ‘특별히 허가된 기관’이라는 뜻의 ‘카르투지오’(Carthusian)란 프랑스어로 된 수도원 명칭에서 유래됐다. 수도사들은 1349년 교회와 수도원을 세웠다. 웨슬리가 차터하우스 스쿨에 다닌 것은 그의 나이 11세인 1714년부터 1720년까지로 6년간 이곳에서 엄격한 신앙훈련과 함께 도제교육을 받았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사춘기에 수도원 교육을 통과한 셈이다. 필자가 런던에서 선교 사역하는 동문의 도움으로 차터하우스를 찾았을 때는 애석하게도 출입이 통제된 시간이었다. 엄격한 경비요원의 저지로 사진 촬영도 할 수 없었다. 실망하던 차에 한 노신사가 수도원에서 나왔다. 한국에서 찾아온 목적을 이야기하고 협조를 부탁했다. 인자한 모습의 노신사는 기꺼이 자신의 외출을 포기하고 수도원 구석구석을 안내해주었다. 이분은 오랜 기간 감독목사로 봉직하다 은퇴한 뒤 이곳에서 만년을 보내는 암브로스 위커스라는 성직자였다. 수도원내 채플로 가는 복도에는 웨슬리의 흉상이 세워져 있고 2층에는 그의 친필도 보관돼 있었다. 2층의 그랜드 챔버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1558년 이래 몇 차례 와서 기도하고 묵은 곳이었다. 1082년 무렵 프랑스 카르투지오에서 시작된 카르투지오 수도원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매우 엄격한 수도회 규칙에 따라 기도와 명상과 노동에 주력하는 영성기관이었다. 어린 웨슬리가 이곳에 입학할 당시 동료는 44명. 엄격한 교육을 견디지 못하는 훈련생들도 있었으나 웨슬리는 훌륭하게 적응했다고 한다. 극기의 힘은 유아기부터 어머니 수재너 여사에게서 받은 가정의 신앙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웨슬리는 수도원 교육이 오히려 편안하고 해방감을 느낄 정도로 만족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의 저널을 보면 후일에 그는 거의 해마다 차터하우스 교정을 찾아 산책하곤 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웨슬리는 청소년 시절의 차터하우스에 대한 애정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를 보더라도 크리스천 자녀들에게 어린 시절의 가정교육은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이 대목에서 한국 교회는 21세기 국가와 민족과 교회를 책임질 청소년들의 바른 영성교육에 주력해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자녀 가운데 제2의 웨슬리 같은 인물이 배출된다면 우리나라와 교회의 미래는 달라지지 않을까?수도원 교육기간에 상급생들이 하급생들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웨슬리는 이러한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잘 인내했는데 그는 후일 이때를 회상하면서 그것이 도리어 건강에 유익한 결과가 되었다고 했다. 웨슬리는 차터하우스 시절에 스스로 다짐한 세 가지 수칙을 지켰다. ‘첫째,불량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 둘째,내가 믿는 종교에 대해 언제나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셋째,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공예배에 빠지지 않으며 기도에 힘쓴다’는 다짐이었다. 웨슬리는 세상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청소년기를 스스로 ‘영적 자기 관리’에 힘씀으로써 극복했을 뿐 아니라 차터하우스 시절에 옥스퍼드 시절의 출중한 신앙훈련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웨슬리는 자기 자신의 영성 상태에 엄격할 정도로 민감하며 외적 경건과 상반되는 내적 갈등과 범죄의식에 괴로워했다. 즉 다른 사람들은 죄로 인식하지 않는 것도 웨슬리 자신은 죄로 인정하면서 부단히 성결의 은혜를 사모했다고 한다. 웨슬리는 6년간의 차터하우스 교육을 마치고 1720년 졸업한다. 그는 우수한 졸업 성적으로 40파운드의 장학금을 받았는데 당시 화폐가치로 매우 큰 금액이었다고 한다. 웨슬리는 같은 해 옥스퍼드의 40여 칼리지 중 가장 규모가 큰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 입학한다. 이 학교 역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도원으로 시작된 학교였다.     김성영 목사<성결대학교 총장> 출처 : 브리스톨연합교회, 글쓴이 : Good모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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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        (출처- http://blog.naver.com/skyculture/60174017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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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        (출처- http://blog.naver.com/skyculture/60174017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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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        (출처- http://blog.naver.com/skyculture/60174017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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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        (출처- http://blog.naver.com/lylyly7/150168177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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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        (출처- http://blog.naver.com/lylyly7/150168177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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