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교회 유산을 만나는 여행] (6) 영국 옥스포드와 캠브리지서 수많은 영적 지도자 배출
▶ 두 대학은 종교 개혁의 요람. 링컨 칼리지서 홀리클럽 시작
▶ 메리여왕, 수많은 성직자와 개신교 학자 체포 감금 화형시켜
런던 북쪽에 위치한 잉글랜드 중부지역에는 ‘현대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 ‘청교도 혁명가’ 올리버 크롬웰,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 등과 같은 믿음의 선진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많다.
그 중 영국의 지성과 신앙이 만든 옥스퍼드(Oxford)와 캠브리지(Cambridge)는 수많은 영적 지도자들을 낳은 곳이다. 그런 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론들과 인물들도 그곳에서 쏟아져 나왔고, 그 사이에서 여러 순교자들이 배출되었는데 오늘은 그 두 도시의 신앙유산과 순교역사를 찾아가 본다.
웅장하고 아름다워 참으로 볼 만한 크라이스트 처치 대성당(Christ Church Cathedral, 주소: St. Aldate’s. OX1 1DP)에서 옥스퍼드의 여정을 시작했다. 크라이스트 처치 대성당은 1200년에 지어진 건물로 아치형의 높은 천장과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인상적이다. 대성당과 인접한 옥스포드에서 가장 큰 칼리지인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Christ Church College)는 16세기 추기경들의 교육을 위한 수도원으로 설립된 곳으로 지난 200년간 16명의 영국 수상을 배출했다.
아인슈타인도 이곳에서 수학했다하니 더 설명이 필요없을 것 같다. 그곳은 영화 ‘해리 포터’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홀의 바닥에는 웨슬리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여 웨슬리 형제가 그 대학 동문임을 상징하는 동판도 있다. 존 웨슬리는 1726년 링컨(Lincoln) 칼리지에서 펠로우(Fellow, 연구교수직)에 임명되었고 그 후 2년 동안은 고향인 엡워스에서 아버지인 사무엘의 목회를 도왔다.
1729년 11월에 링컨 칼리지의 교수로 복귀했을 때 동생 찰스 웨슬리가 그해 1월에 만들어 모이기 시작한 Holy Club(신성회)과 만나게 된다. 링컨 칼리지는 크지 않은 소박한 규모의 대학이지만 그 곳에서 감리교운동의 씨앗을 품었던 Holy Club이 시작된 중요한 곳이다.
그 외에도 옥스포드 대학내 여러 칼리지에서 종교개혁의 샛별인 존 위클리프, 작가인 C.S. 루이스, 성경 번역가인 윌리엄 틴데일, 위대한 설교자인 조지 휫필드와 청교도 지도자인 존 오웬 등 신앙의 위인들과 세계역사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지도자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1320년에 처음 세워진 후 1602년 토머스 보들리에 의해 재건된 보들리언 도서관은 구텐베르크 성서, 셰익스피어의 ‘최초 전집(First Folio)’ 등 희귀 원본들이 소장된 영국내 최대 대학도서관이다.
캠브리지는 13세기 초 옥스퍼드에서의 내분을 계기로 여러 학자들이 옮겨 오면서 시작되었다. 단일 대학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벨수상자를 배출하였다. ‘아는 것이 힘이다’의 베이컨, 《실락원》의 존 밀턴(Milton), 과학자 아이작 뉴턴, 찰스 다윈을 비롯한 유명 석학들이 공부한 곳이다.
영국교회의 개혁을 위해 영성과 학식을 갖춘 개신교 설교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세워진 임마누엘 칼리지(Immanuel College)를 비롯하여 16~17세기 영국의 청교도운동을 이끌던 윌리엄 퍼킨스, 토마스 굿윈을 배출한 곳인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Christ Church College, 주소: St. Andrew’s Street, Cambridge CB2 3BU), 영국의 의회파와 왕당파간의 소용돌이 시대에 새로운 정치 종교 개혁세력인 청교도들의 배출장소가 된 시드니 서섹스 칼리지(Sidney Sussex College) 등은 교회역사를 공부하는 학도라면 반드시 찾아가 봐야 할 장소이다.
32명의 노벨상 수상자, 6명의 영국 수상을 배출한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와 10명의 노벨상 수상자, 7명의 영국 수상을 배출한 세인트 존스 칼리지(St. John's College)는 캠브리지 대학내에서 지금도 가장 선망되는 학교이다. 19세기 세계선교의 꿈을 안고 중국을 향해 떠난 캠브리지 7인을 비롯한 수많은 청년들을 양성한 캠브리지의 설교가 찰스 시메온(Simeon)의 영향은 아직도 많은 젊은이들을 움직이게 한다.
영국 교회유산 탐방에서 옥스포드와 캠브리지 대학이 중요한 이유는 두 대학이 종교개혁의 요람이기 때문이다. 1517년의 종교개혁에 대해 에라스무스가 알을 품고, 마틴 루터가 부화를 시켰다고 말하는데 르네상스 시기의 가장 중요한 인문학자인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Erasmus)가 퀸스 칼리지(Queens College)에서 집필과 교수활동을 했다.
영국의 종교개혁을 주도한 틴데일(Tyndale, 영어성경번역자), 휴 라티머(Latimer), 토마스 크래머(Crammer)의 흔적도 캠브리지에 생생히 남아있다. 그들은 루터의 사상과 성경을 기반으로하여 영국 개신교의 기틀을 놓았다. 크래머는 영국의 ‘명동성당’이라 불리는 켄터베리 대성당의 대주교로서 성경번역의 자유를 주는 동시에 성경의 권위가 어떤 것보다 우위에 있도록 교회를 개혁했다. 틴데일과 라티머는 존 폭스(John Foxe)와 함께 옥스포드 모들린 칼리지(Magdalen College)의 3인방으로 불리웠으며 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종교개혁에 헌신했다.
그러나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 1세(Mary I, 1516년~1558년)가 영국의 여왕으로 즉위하면서 종교개혁에 앞장섰던 옥스포드와 캠브리지 출신의 수많은 성직자들과 개신교 학자들을 체포, 감금하여 차례대로 화형시켰는데 그 수가 300명에 달했다.
대부분의 순교자들은 옥스포드의 세인트 마이클 교회에 마련된 감옥에 감금되어 있다가 옥스포드 밸리올 칼리지(balliol College) 근처 브로드 스트리트(Broad Street)에서 나무 기둥에 묶여 화형당했다. 이로 인해 메리 여왕은 ‘피의 메리(Bloody Mary)’로 불리게 되었다.
크래머 주교는 참형의 위협 앞에 잠시 죽음이 두려워 자신의 주장을 철회한다고 서명했으나 그것이 커다란 수치임을 깨닫고, 나중에 화형당할 때 서명한 오른손부터 불에 넣었다. 가톨릭의 워스터 대주교에서 종교개혁자로 돌아선 휴 라티머는 함께 화형대에 오른 런던 대주교 출신의 니콜라스 리들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편히 잠드세요, 리들리 형제, 끝까지 용기를 잃지 마세요. 우리는 오늘 영원히 꺼지지 않을 촛불을 켜는 겁니다”. 이러한 순교자들의 역사는 가톨릭 사제였던 존 폭스에 의해 전해졌다. 그는 수많은 종교재판 기록들과 성경을 비교하다가 순교자들 속에 진리가 있음을 발견하고 《순교사화》를 썼다.
그 《순교사화》의 마지막 글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순교자들의 거룩한 순례를 기억하면서 찬사를 보냈다. 인간의 칭찬은 일시적이며, 부활하는 날까지로 제한되어 있지만 주님의 칭찬은 영원하다.”<계속>
<고상환 목사 (세계선교침례교회 담임, 게이트웨이신대원 초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