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 생가 올드 랙토리 (Old Rectory, Epworth )
John Wesley by Frank O. Salisbury (출처-http://en.wikipedia.org/wiki/John_Wesley)
1. 존 웨슬리의 고향 올드 랙토리
Childhood home of both John and Charles Wesley (출처-https://www.flickr.com/photos/dhwright/318438158/in/photostream/)
영문으로 'Epworth'라고 쓰는 이 지명은 초기한국감리교회사에 '엡웟청년회'라고 소개 된다. 선교사들의 권유로 탄생한 '엡웟청년회'(Epworth League, 현 기독교대한감리회청년회)의 ‘엡웟’(Epworth)은 존 웨슬리의 출생지인 바로 이곳의 지명을 딴 것이다. 그 뜻이 "하나님의 은혜로 자라남"이라하니 청년회의 이름으로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엡워쓰에는 존 웨슬리의 생가이며, 아버지인 사무엘이 죽던 1735년까지 가족들이 살았던 올드 랙토리(Old Rectory)로 불리는 붉은 벽돌로 지은 3층(다락방포함)의 목사관이 있다. 물론 지금은 웨슬리의 숨결을 찾는 방문객들을 맞는 박물관으로 바뀌어있다. 정문을 지나 1층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웨슬리의 사진, 괘종시계, 부모의 초상화, 열쇠 등이 전시된 거실이 있다. 오른편으로 연결된 방은 현재 기념품 판매소로 쓰이고 있는데, 당시에는 어머니인 수산나가 아이들을 가르치던 공부방이었다고 한다.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다보면 복도에 걸려있는 팔 벌려 한 폭은 됨직한 그림이 눈길을 사로잡는데, 1907년 올드 랙토리를 전소시켰던 대형화재사건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의 첫 기억이 있기 마련이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첫 기억이 개인의 생애유형 발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우리는 그 그림에서 웨슬리의 첫 기억을 찾아 볼 수 있었다. 존 웨슬리가 평생 스스로를 ‘타는 불에서 꺼낸 부지깽이’(A brand plucked out of the burning)라고 여겼던 그 이야기를 들으면 그의 인생의 출발점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Outside view of the Epworth Old Rectory
Epworth Old Rectory, childhood home of John Wesley (출처-https://www.flickr.com/photos/boston_public_library/2396137219/)
2. 웹워쓰 목사관 화재사건
웹워쓰 목사관 화재사건을 그린 그림. 생가 2층 계단 복도에 걸려있는 그림이다
1907년 2월 9일 수요일, 깊은 밤, 다섯 살 된 존 웨슬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문틈으로 스며드는 자욱한 연기는 방안을 이미 독한 냄새로 채워가고 있었다. 목사관에 화재가 발생한 것을 처음 발견한 것은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 “불이야!”라는 소리에 놀라 일어난 그는 황급히 아내와 딸을 깨웠다. 하녀도 급히 육아실로 달려가 아이들을 집밖으로 대피시켰다. 그러나 웨슬리 가족은 아무도 존 웨슬리가 집안에 남겨진 사실을 알지 못했다. 존 웨슬리는 “살려달라” 울부짖기 시작했고 이 외침은 사무엘에게 들렸다. 사무엘은 목사관으로 들어가려 시도했지만, 이미 불계단으로 변해있었다. 사무엘은 현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존 웨슬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긴다’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존 웨슬리는 포기하지 않고 침착하게 살 방도를 찾고 있었다. 그는 방안에 있던 테이블(혹자는 궤짝)을 창가로 밀어 놓고 그 위에 올라가 껑충껑충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밖에서 서성이던 한 사람이 웨슬리를 발견한다. 인간사다리를 만들자는 제안에 인간사다리를 만든 뒤 창문을 통해 존 웨슬리는 구출 되었고 그 순간 목사관 지붕은 폭삭 내려 않았다. 1753년, 웨슬리 나이 50세 때, 그는 의사로부터 죽음을 준비하라는 통보를 들을 정도로 깊은 병이 들었다. 존 웨슬리는 미리 자신의 비문을 준비하는데, 자신의 이름 다음에 ‘A brand plucked out of the burning...’(타는 불에서 꺼낸 부지깽이)로 뒷 말을 이어간다. ‘타는 불에서 꺼낸 부지깽이’ 존 웨슬리. 그에게 이 화재 사건이 어떤 의미 다가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화재 당시의 나무조각
동영상 (출처-http://www.youtube.com/watch?v=rAUBz1__Uno&feature=player_detailpage)
3. 자녀 양육의 장(場) 식당
처음 올드 랙토리(Old Rectory) 앞에 섰을 때, 목사관치곤 예상보다 큰 게 아닌가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웨슬리 가족이 자녀만 열아홉(이중 아홉 사망)의 대가족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 정도 규모는 되었어야 했겠다는 생각도 든다. 수산나는 1690년 첫 자녀 사무엘(주니어)을 시작으로 거의 매년 출산했다. 그리고 이 자녀들 가운데서 요한 웨슬리(15번째)와 찰스 웨슬리(18번째)같은 세계적인 인물이 배출됐다. 수산나는 이 많은 자녀들을 바로 식당에서 훈련 시켰다. 7~8평쯤 돼 보이는 식당 이곳이 수산나의 자녀 양육의 장(場)이었다. 정갈한 베이지색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커다란 주전자가 걸려있는 벽난로가 보이고, 벽난로 양 옆으로는 채광이 잘되는 창문이 바깥 경치를 담아내고 있었다. 식당 한복판에 자리 잡은 식탁 위에는 당시에 사용했던 금속제 접시와 주전자, 컵, 양념통, 포크와 나이프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좌측 먼 구석 쪽에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입구와 밤색 장판으로 덮인 계단이 보였다. 이 장소는 단순히 식사만 했던 부엌이 아니었다. 잿더미가 된 사제관은 당시 4백 파운드의 공사비를 들여 1년 동안 재건축됐는데, 특히 수산나의 활동공간이었던 부엌은 식당뿐만 아니라 공부방으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절반을 막아 기념품 판매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지만, 바로 이곳에서 수산나는 하루 6시간씩 규칙적으로 자녀들을 철저히 교육했던 것이다. 웨슬리는 이때 받은 교육에 깊은 영향을 받았던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는 1732년 어머니에게 자신에게 사용했던 교육방법을 알려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수산나의 교육은 자녀 대에서 끝나지 않고, 홀리클럽, 나아가 존 웨슬리를 따르는 회원들의 규칙 속에 면면히 반영되어 흐르게 된다
동영상 (출처-http://www.youtube.com/watch?v=R5BGgR07uvI&feature=player_detailpage)
4. 수산나의 교육방법과 내용
수산나웨슬리 (출처- 웨슬리 스토리)
수산나는 엄격한 규율과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철저히 자녀를 양육했다. 아이가 태어 난지 석 달만 지나면 어김없이 그녀는 정한 시간에 요람을 흔들어 아기를 재우고, 깨우면서 규칙적으로 잠을 자도록 훈련했다. 말문이 트인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날 때와 밤에 잠잘 때 꼭 주기도문을 외워야 했다. 또 주일이 보통 날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별하도록 가르쳤다. 일 년에 한번씩 목사관에는 “알파벳잔캄” 이라는 행사가 있었는데, 다섯 살을 맞은 자녀가 알파벳을 처음 배우는 날이었다. 이때부터 자녀들은 오전 9~12시, 오후 2~5시까지 매일 여섯 시간 이상 공부방인 주방에 모여 공부했다. 하루 만에 알파벳을 배운 자녀는 다음날부터 창세기를 보면서 철자법, 독법, 서법 등을 배우고, 산수, 문법, 역사, 지리도 차례로 익혀나갔다. 수산나의 교육방법 중 특별한것은 일주일을 단위로 매일 순서를 정해 아이들과 한 시간씩 대화를 나누는 개별상담이다. 그녀는 매일 저녁, 시간을 정해 놓고 요일별로 돌아가며 모든 아이들을 개별적으로 상담하고 기도해 주는 신앙의 어머니였다. 존 웨슬리는 목요일에 면담시간을 가졌는데, 이 은밀한 시간이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경건의 훈련을 받았다. 수산나는 자녀들이 꼭 지켜야 할 여덟 가지 원칙 세칙을 정했는데 첫째, 잘못을 범했더라도 누구든지 솔직하게 자백하고 고칠 것을 약속하면 매를 맞지 않도록 한다. 둘째, 거짓말, 좀도둑질, 교회에서 또는 주일에 장난치는 일, 불순종, 말다툼 등의 죄 된 행위는 반드시 벌을 주어야 한다.... 넷째, 순종하는 행위의 표시는 모두 칭찬하고 그 동기의 공로에 따라 자주 상을 준다.... 일곱째, 약속은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 수산나는 매를 통한 죄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 자신의 의지를 꺾는 순종의 소중함, 규칙생활을 자녀들에게 심어주려 노력했다.
수산나웨슬리
수산나웨슬리 묘지, 런던 번힐 필드
번힐 필드 무덤은 수잔나 웨슬리가 묻혀있어 중요한 무덤이 되었다. 이 무덤은 성공회 신자가 아닌 비국교도의 무덤으로 수잔나의 남편은 성공회 사제였으나 존 웨슬리와 촬스 웨슬리가 감리교 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번힐 필드에 묻히게 되었다. 수잔나의 비석은 1828년에 세워졌으며 미국 메릴랜드 프레드릭에 있는 수잔나 주일학교에서 도움을 주어서 1978년 다시 복구되었다. 이곳에는 존 번연, 다니엘 디포우 등이 묻혀있다. (출처- 웨슬리 스토리)
런던 번힐 필드
5. 올드 랙토리 1층 기념품 판매소
올드 랙토리 1층에는 웹워쓰 관련 기념품 판매소
과거엔 식당이었지만 지금은 벽으로 분리돼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기념품 가게에서는 백발의 자원봉사자들이 ‘웹워쓰’관련 물품을 판매하고 있다. 엽서, 액자, 책갈피, 올드 랙토리 정원에서 자란 나무로 만든 십자가 같은 소품들, 각종 서적과 CD등이다. 진열된 서적중에는 플라스틱 링으로 제본한 B5 9쪽 분량의 ‘Educating the Family'라는 수산나의 교육을 소개한 소책자도 있다
2층 웨슬리 부모 침실
전시물
내부 그림
내부 웨슬리상과 초상화
내부 웨슬리상과 초상화
내부 웨슬리상과 초상화
웨슬리 책상
웨슬리 부모
사무엘 웨슬리
사무엘 웨슬리 저서
6. 3층 다락방과 유령사건
올드 랙토리 3층에 있는 유령이 출현했다는 다락방
어린시절 존 웨슬리의 누이가 입었던 옷도 전시되어 있다
방바닥 한 쪽에 사각형으로 구멍을 뚫어 대들보를 직접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유령사건
3층으로 난 계단을 올랐다. ' To Old Jeffery's Chamber '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는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서자 정적이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면에 난 창은 방 전체를 밝히기엔 턱없이 작았지만, 조명과 진열장에서 스며 나오는 빛이 포근하게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방 우측에는 누이들이 어린 시절에 입었던 옷가지와 도자기 류 생활용품이, 뒤편에는 웨슬리 흉상과 소품이 가지런히 진열돼있었다. 특이하게 방 앞쪽 바닥을 가로세로 30센티 정도로 걷어내고 유리를 씌워 방문객이 대들보를 직접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아마 1709년에 있었던 대화재 사건 이후 집을 재건축할 때 사용했던 자재가 당시 파선된 배에서 나온 목재였음을 보여주기 위함인듯하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웨슬리가의 사정을 짐작케 한다. 목사관의 유령 출몰이 과연 사실일까? 유령에 대한 보고는 마샬이라는 하녀가 남자가 죽어가며 내는 신음소리를 들었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어 에밀리(23세)도 병이 깨지는 소리와 석탄덩어리가 부엌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았으나 어떤 증거물도 없었다고 한다. 반신반의했던 사무엘 부부도 며칠이 못돼 유령의 소리를 직접 듣게 된다. 어떤 밤은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의 상황도 겪게 된다. 저녁식사 중 사무엘의 접시가 식탁 위에서 춤을 추는가 하면,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밀침을 당하기도 한다. 일의 심각성을 느낀 사무엘은 급기야 축사(exorcism)의 은사를 가진 동료 사제 조셉 훌을 초청해 유령의 존재를 확인하기도 했다. 유령의 잦은 출몰로 사무엘의 딸들은 오히려 유령소동을 즐기는 지경까지 갔다고 한다. 한번은 세 자매가 육아실에 있을 때 침대가 공중에 뜨자 앤니가 침대 위에 올라타 놀았을 정도였다니 필자의 상상력이 바닥을 드러낸다. 에밀리는 이 유령에게 제프리(Old Jeffrey)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안내인의 설명에 따르면 제프리는 이전에 올드 랙토리에 살았던 정원사였다고 한다. 이런 유령소동은 1715년 12월 초에 시작되고, 이듬해 2월초까지 지속되다가 특별한 이유 없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유령출몰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유령사건의 전모를 알려주는 웨슬리가의 서신을 소장하고 있는 조셉 프리스틀리 박사는 집안 하인들이 외부인과 짜고 저지른 일일 것이라는 합리성에 바탕을 둔 설명을 한다. 딸 중 가장 용모가 빼어난 19세의 헤티에게 구애하는 마을 청년들의 장난이었을 것이라는 또 다른 추측도 있다. 하지만 당시 고향을 떠나 런던에 유학 중이었던 존 웨슬리는 자신이 유령소동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지만, 어머니와 자매들의 편지로 상세히 유령소동을 접하고는 이 사건이 환각이나 환청, 사람에 의한 조작이 아닌, 유령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합리성이 고개를 드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웨슬리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그의 기독교 신앙의 이해가 보이는 것 너머의 것도 포괄하는 균형감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출처- 감리교 기독교타임즈 곽인 기자)
감리교의 기원과 한국감리교의 역사 (김홍기 교수, 감신대 교회사) 출처( bmc.hwp(62.7 KB))
감리교회 웨슬리는 18세기가 시작되는 초엽 1703년에 태어나서 18세기가 끝날 무렵 1791년에 소천하였다. 거의 한 세기를 장수한 건강하고 의미있는 삶이었다. 그의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Samuel Wesley)는 성공회 사제였고, 증조부 바돌로매오 웨슬리 (Bartholomew Wesley)와 할아버지 존 웨슬리(John Wesley: 감리교창시자 존 웨슬리와 이름이 같음)도 청교도 목사였다. 그러니까 웨슬리는 4대째 목사가 된셈이다. 외할아버지 사무엘 아네슬리(Samuel Annesley)도 청교도 목사였다. 1703년 6월 17일 존 웨슬리가 사무엘과 수잔나의 19자녀중 15째로 출생하였다.(9명의 자녀들은 일찍 사망하고 10명의 자녀만 성장하였는데 7자매들은 불행한 생을 살았고, 형 사무엘2세와 동생 찰스와 존의 삼 형제만 사회적 교회적 기여를 하였다. 1720년 6월 24일 장학생으로(40파운드) 옥스포드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Oxford University Christ Church)에 들어갔다. 고전문학, 라틴시, 희랍어신약성서, 희브리어구약성서, 신학서적 탐구하였다.(신학교가 따로 없었음) 1725년 9월 19일 집사사제(준회원) 안수를 포터(Potter)감독으로 부터 받았다. 존이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er)의 저서를 통해 완전성화를 추구하기도 하였다. 여태까지는 1738년 5월의 올더스게이트가(Aldersgate Street) 사건이 존 웨슬리의 회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