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생애 (1509~1564)
칼빈의 생애
2009년 7월 10일은 칼빈이 태어난 지 오백 년이 되는 날입니다. 작년에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전 세계에서 칼빈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는 크고 작은 행사들이 있었습니다. 최종원 교수님의 말씀처럼 루터가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제거한 사람이라면, 칼빈은 그 위에 종교 개혁의 나무를 심고 가꾼 사람입니다. 칼빈이 없었다면 개혁 신앙은 한 동안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헤매고 말았을 것입니다. 종교 개혁의 역사와 칼빈의 생애를 보면 하나님께서 루터에 이어 칼빈 한 사람을 택하시고 준비하셔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어떻게 다스리시고 섭리하셨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시간 우리가 칼빈을 통해서 그의 개혁 신앙과 빼어난 성경 선생으로서의 자세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칼빈의 성장과 회심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왕국의 누와용에서 태어났습니다. 칼빈의 아버지는 누와용 지방의 유지로서 집안 형편은 부유한 편이었습니다. 칼빈의 아버지는 칼빈에게서 지적인 재능이 있다는 것을 일찍이 발견하고 칼빈이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최고 학문으로 인정 받던 신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칼빈을 12살 어린 나이에 파리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당시에는 본격적으로 신학 공부를 학기 전에 먼저 인문학에 대한 소양을 기르는 과정을 거치도록 했습니다. 칼빈은 문법, 논리학, 수사학, 라틴어 등을 두루 공부했고 뛰어난 학업 성취도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칼빈의 아버지는 칼빈이 17살이 되던 해에 갑자기 신학을 그만 두고 법학을 공부하라는 방향을 주었습니다. 부친의 마음이 바뀐 까닭은 칼빈의 아버지가 돈 문제로 교회와 갈등이 있었고, 성직자보다는 법률가가 돈을 더 많이 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칼빈은 인문학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고, 법학에 별 흥미가 없어서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순종적이었던 칼빈은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지 않고 그대로 따랐습니다. 5년 후, 칼빈의 아버지가 병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자유가 된 칼빈은 즉시 법학 공부를 그만 두고 자기가 하고 싶던 인문학 공부에 심취하게 됩니다. 당시 전 유럽은 르네상스 열풍이 불고 있었고, 칼빈 역시 이에 영향을 받아 라틴어와 헬라어로 된 고전 문학 연구에 열을 올리게 됩니다. 후에 칼빈이 신구약 성경을 원어로 자유 자재로 읽고 연구하며, 라틴어로 쓰여진 초대 교회 교부들의 책과 스콜라 철학 서적들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던 기초가 이때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칼빈은 학생 시절 로마 카톨릭에서 마르틴 루터가 시작한 개신교 신앙으로 회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학자들은 칼빈이 언제 어떻게 회심하게 되었는지 알아 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무도 확실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대략 20세부터 24세 사이의 언제 쯤이라고만 추정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칼빈의 회심에 대해 알기가 어려운 이유는 칼빈은 자신의 대한 이야기를 극도로 아끼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책을 내고 설교를 한 칼빈이었지만 자신의 회심에 대해서 언급한 곳은 시편 주석 서론에서 단 한 문장을 언급한 것이 전부입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외의 회심을 통해 나의 사고 방식을 바꾸시고, 뭔가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으로 다듬어 주셨다." 의외의 회심이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칼빈이 전혀 준비하거나 기대하지 않던 상황에서 회심을 경험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칼빈이 회심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에서 소위 '플랭카드 사건'이 일어납니다. 1534년 초 어느 주일 아침에 프랑스 전역에서 심지어 프랑스 왕의 침실 안에까지 카톨릭 교회의 개혁의 필요성을 외치는 벽보가 붙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프랑스 내에 개신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핍박이 일어나게 되고, 칼빈 역시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프랑스를 떠나게 됩니다. 이때 잠시 스위스 바젤에서 피란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 기간 동안 칼빈은 글쓰기에 집중하여 '기독교 강요' 초판을 완성하게 됩니다. 초판 기독교 강요는 여섯 개의 장으로 구성된 개신교 기독교 신앙의 소개서였습니다. '기독교 강요'는 출판되자마자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많은 개신교 지도자들이 이때부터 칼빈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쓴 시점은 회심을 한 후 길어야 5년 빠르면 1년 남짓 지난 시점이었으며, 그의 나이 는 겨우 26살이었습니다. 이후 칼빈은 틈이 날 때마다 '기독교 강요'를 개정했고, 1559년 최종판은 초판에 비해 무려 5배나 분량이 늘어나 있었습니다.
2. 칼빈의 첫 번째 제네바 사역
칼빈이 선택한 최종 망명지는 독일의 스트라스부르크였습니다. 칼빈은 그곳에 가서 조용히 종교개혁 운동을 위해 학문을 연구하고 저술 활동에 힘쓸 계획을 세웠습니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로 향하는 길에 잠시 스위스의 제네바를 들렸습니다. 당시 제네바 시는 로마 카톨릭에서 개신교로 전향한 지 몇 달이 되지 않는 시점이었습니다. 제네바 시의 개신교 지도자는 기욤 파렐이었습니다. 파렐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읽은 후 종교 개혁을 제네바시에 정착시킬 수 있는 적임자로 칼빈을 지목하였습니다. 파렐은 마침 칼빈이 제네바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가 칼빈에게 제네바에 남아 교회를 세워달라고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스트라스 부르크에 가서 공부와 저술을 할 것이라며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파렐은 칼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계속 내 제안을 거절한다면 하나님께서 스트라스부르크에 숨어 조용히 공부하고 싶은 당신의 그 소원을 반드시 저주하실 것이요" 거의 협박이나 다름없는 이 말에 덜컥 겁을 먹은 칼빈은 결국 마지못해 파렐의 제안을 수용하여 제네바에 눌러 앉게 되었습니다. 칼빈은 이곳에서 목사로서 안수를 받고 설교와 심방을 감당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삶을 살게 됩니다. 또한 칼빈은 파렐과 함께 제네바 신앙 고백와 요리 문답을 만들어 시민과 젊은이들에게 건강한 신앙의 기초를 놓을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곧 제네바 시당국과 크고 작은 마찰을 겪게 됩니다. 시당국은 교회가 시당국의 관할 아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교회의 일에 이런 저런 간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칼빈은 교회는 교회 안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정치 권력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치리할 권한이 있다고 믿고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 시당국과 칼빈과의 갈등은 점점 더 심해졌고 결국 칼빈은 파렐과 함께 제네바 시당국으로부터 추방령을 받아 쫓겨나게 됩니다. 28세의 칼빈은 첫 목회지에서 채 만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쫓겨나는 쓰디쓴 아픔을 겪게 됩니다.
3. 스트라스부르크 망명 시절
첫 번째 목회가 실패로 끝난 뒤, 칼빈은 원래 계획했던 대로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조용히 연구에만 전념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러나 스트라스부르크의 종교 개혁 지도자였던 마틴 부처는 칼빈에게 프랑스에서 망명 온 사람들을 위한 교회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제네바에서 입은 마음의 상처와 아픔 때문에 칼빈은 이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저하였습니다. 그러자 마틴 부처는 칼빈에게 주님의 부르심에 등을 돌리는 요나처럼 되지 말라는 경고를 했습니다. 결국 칼빈은 또다시 마지못해 청을 받아 들이고 난민 교회의 목회를 시작합니다. 이때 칼빈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결혼을 한 것이었습니다. 31세였던 칼빈은 전 남편 사이에서 이미 두 자녀를 두었던 이들레트 드 뷔르라는 미망인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들레트는 신실했고 헌신적으로 남편을 잘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들레트와 칼빈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지만 태어난 지 며칠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던 이들레트마저도 결혼한지 9년 만에 병으로 죽어 칼빈의 곁을 떠났습니다. 이후 칼빈은 재혼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독일 땅인 스트라스부르크에 있는 동안 칼빈은 독일의 루터파 교회와 연합을 이루는 일에도 힘을 썼습니다. 칼빈은 비록 직접 루터를 만나는 못했지만, 루터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멜랑히톤과 교제하면서 서로 배우고 존경하는 관계를 평생 유지해 나갔습니다. 칼빈은 또한 이 기간 동안 첫번째 발간한 성경 주석서로서 로마서 주석를 출간하였습니다. 이 주석은 당시 다른 로마서 주석서에 비해 간결함과 명료함로 인해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칼빈은 방대하고 복잡한 내용을 종합하고 요약하는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4. 제네바로 복귀한 칼빈
칼빈이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잘 나는 사이에 제네바 교회의 상황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칼빈을 지지하는 파와 반대하는 파 이렇게 두 파로 갈렸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칼빈 지지파의 숫자가 더 커졌고, 마침내 1540년 시정부는 칼빈을 다시 제네바 교회로 부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다시 제네바로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파렐이 다시 나섰습니다. 파렐은 칼빈을 설득했고 칼빈은 또 파렐의 말을 듣고 제네바로 돌아가기로 결심을 합니다. 칼빈의 글을 보면 주저함이 없는 확신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일에 있어서 칼빈은 자기 의견을 강하게 피력하기 보다는 주로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대로 따라가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칼빈이 제네바로 돌아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전에 쫓겨났을 때 마지막으로 전한 성경 본문 다음 장부터 설교를 다시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칼빈의 칼 같은 성격이 잘 드러난 대목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칼빈은 먼저 시당국과 갈등을 빚었던 교회의 치리 문제에 대해 정부 당국과 확실한 담판을 지어 교회의 자치권을 인정받았습니다. 제네바에서 칼빈은 매주 5번 정도 메시지를 전하고 성경 공부 모임을 인도하고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양들을 심방하고 1년에 1권 이상 주석서를 쓰며 전 유럽에서 오는 편지에 답장을 해 주는 등 거의 살인적인 강도로 목회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칼빈의 설교를 손으로 옮겨 적는 비서가 따로 있었는데 그를 통해 오늘날까지 1,500편에 달하는 칼빈의 설교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칼빈은 죽을 때까지 제네바 시에 머물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개혁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첫째, 예배와 성례의 개혁입니다. 칼빈은 예배는 신자들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진리를 맛보는 자리로 규정하고 예배를 개혁하기 위해 직접 팔을 걷어 붙였습니다. 칼빈이 세운 예배의 원리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배는 단순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원리에 의거해서 예배의 순서와 형식을 규정했고 로마 카톨릭의 구습을 ㅤㅆㅣㅆ어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특징적인 것은 칼빈은 예배에서 찬양을 매우 중요시여겼는데 현대의 찬양과 다른 점은 모든 악기를 없애고 반드시 무반주로 찬양을 하게 했고 노래의 가사는 모두 시편을 가사로 해서만 부르도록 했다는 점입니다. 칼빈이 그렇게 한 까닭은 음악이 너무 화려하면 거기에 마음을 빼앗겨 일종의 우상 숭배로 흘러갈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로마 카톨릭이 정의한 일곱개의 성례를 축소하여 오직 성경에서 규정하고 있는 세례와 성찬만을 성례로 인정하였습니다. 칼빈은 특히 성찬식을 중요하게 여겨서 매주 주일마다 성찬을 하려고 했지만 시당국의 강한 반대에 부딪쳐 결국 3달에 한 번씩 성찬식을 시행하였습니다.
둘째, 사회의 개혁입니다. 칼빈은 제네바 시를 기독교적 윤리가 지배하는 도시로 만들려는 열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칼빈은 시정부와 협력하여 카드 놀이와 음란한 춤을 금지하도록 했고, 한번에 팔 수 있는 술의 양을 제한하고 모든 술집에는 반드시 성경책을 갖다 두도록 했습니다. 제네바 아카데미라는 신학교를 설립하여 연단된 말씀의 종들을 많이 배출하여 전 유럽에 개혁 신앙을 전파하는 전초기지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였습니다. 제네바 시에는 이런 칼빈의 조치들에 대해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이는 자기 집 개 이름을 칼빈이라고 짓기도 하고 어떤 이는 칼빈을 조롱하는 짧은 노래를 만들어 퍼뜨리기도 했고 또 어떤 이는 칼빈의 철자를 약간 바꾸어 가인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이런 반발에 전혀 요동하지 않고 묵묵히 제네바 시를 개혁해 나갔습니다. 칼빈의 지지파와 반대파 간에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결국 칼빈의 지지파가 승리하였고 그 상태는 칼빈이 죽을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셋째, 신학의 개혁입니다. 칼빈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성경에 자신을 바친 사람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신학은 카톨릭 교회가 신학적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칼빈은 루터와 함께 오직 성경만이 기독교 진리의 확실한 근거를 제공한다는 사상을 공유했으며 루터보다 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지식과 판단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신 성경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하나님을 참되게 아는 지식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칼빈은 성경으로 충분하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전통이나 관습, 규례 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충하거나 대신할 수 없음을 지적하였습니다. 두 번째로 칼빈은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자신을 구원할 일말의 가능성조차 남겨져 있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하였습니다. 이 점은 후에 일어난 알미니우스주의 또는 존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과 다른 차별점입니다. 알미니우스주의에서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이 구원하시지만 그 구원하시는 손길을 부여잡는 것은 인간의 선택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의 구원은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을 건져내시는 구원이 아니라 이미 물에 빠져서 죽어 버린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인간의 공로가 개입될 여지가 한 치도 남지 않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칼빈은 예정론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 사항을 확립하였습니다. 흔히 칼빈하면 먼저 예정론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예정론은 칼빈의 독창적인 사상이 아니었습니다. 예정론은 어거스틴의 사상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동시대 마르틴 루터 역시 예정론을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예정론은 바울 서신서를 비롯하여 성경에 나오는 진리입니다. 또한 칼빈 사상 전체를 놓고 보면 예정론이 핵심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예정론이 유명해지게 된 까닭은 칼빈은 예정론을 단지 이론적으로 가르치지 않고 믿는 사람에게 크나 큰 위로와 소망을 주는 진리로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칼빈은 예정론 때문에 여러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칼빈의 예정론을 기계적인 결정론으로 잘못 이해한 데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칼빈이 예정론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모든 일이 다 결정되어 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하시는 전적으로 자유로운 분이시며 모든 피조물을 만드시고 소유하고 계시는 주권자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말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이는 모두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이며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 가운데 일어난 일임을 알고 성도는 큰 위로와 소망을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정론을 논하다 보면 인간의 상상력이 더해져서 별의별 기발한 생각과 논쟁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칼빈은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 성경이 나아가는데까지 나아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멈추어야 함을 역설하고 그 이상 진도를 나아가려는 것은 모두 교만에서 비롯된 죄가 된다는 것을 경고했습니다. 칼빈은 위에서 언급한 모든 것을 그의 대표작인 '기독교 강요'에 담아 개혁주의 신학의 뼈대를 만들고 당대와 후대에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5. 이름 없는 무덤
말 년의 칼빈은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칼빈은 전혀 쉬거나 일의 양을 줄이지 않고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결국 1564년 5월 27일 토요일 칼빈은 54세를 일기로 평안한 가운데 눈을 감았습니다. 칼빈은 주일에 제네바의 한 비밀장소에 있는 이름 없는 무덤 속으로 안장되었습니다. 칼빈은 죽은 후에 사람들이 자신의 무덤으로 찾아오는 것조차 혹시라도 우상 숭배가 될까 염려하여 이름 없는 무덤에 누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알고보면 저는 칼빈에게 큰 빚을 진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제 신앙 생활에서 크게 세 번의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십자가에서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만난 시점이요 두 번째는 죽음을 이기신 부활하신 생명의 주 예수님을 만난 시점이요 마지막으로 칼빈 사상이 중심이 되는 개혁주의 신앙을 만난 시점입니다. 저는 칼빈이 가르친 개혁 신앙에서 두 가지를 깊이 배웠습니다. 첫째는 철저하게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라보는 방법입니다. 이전에 저는 죄는 나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혁 신앙은 그에 앞서 죄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대상이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저는 구원이 내가 기쁨과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것이 때문에 꼭 받아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개혁 신앙은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와 거룩과 능력이 나타나는 사건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저는 내가 믿어서 구원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개혁 신앙은 내가 믿기 전에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같은 것이라도 내 편에서 볼 수도 있고 하나님 편에서 볼 수도 있음을 발견했고, 결국 신앙이란 것은 내 중심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적인 시각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임을 칼빈을 통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저는 칼빈을 통해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무능력함에 대해 배웠습니다. 이전에 저는 인간의 타락을 믿었지만 그래도 아직도 타락하지 않은 구석이 어딘가 남아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인간의 지성과 이성의 영역이었습니다. 날카로운 지성을 가진 세계의 석학들이 했던 말이라면 무조건 껌뻑 죽고 감동을 받고 이를 추종했습니다. 저는 음란, 강포, 거짓말 등이 죄이지, 지성과 이성으로 빚어낸 걸출한 사상들이 죄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인간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죄로 인해 오염되지 않은 부분은 단 한 고도 없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인간의 지성과 이성도 역시 죄로 오염된 부분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서야 제 눈에 칭송받는 지성들이 만들어 낸 사상이 얼마나 인본적이며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사상들인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생각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런 사상을 추종해 왔던 저의 죄들을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고 회개하였습니다. 칼빈으로부터 시작된 개혁 신앙은 저에게 내가 아닌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과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사고와 지성에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
칼빈은 분명 엄청난 지적 능력을 지닌 천재였고 엄청나게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칼빈은 그 천부적인 재능을 일생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일에 바쳤고, 근면과 성실함으로 하나님이 말겨 주신 교회와 양무리들을 돌보는데 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시대 성경 선생이요 목자가 되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칼빈은 모범을 보인 선생이면서 동시에 격려와 자극을 주는 인물입니다. 우리가 칼빈을 잘 배워서 캠퍼스 양무리들의 선한 목자요 빼어난 성경 선생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