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탄생 년도와 인구조사.
I. 서 론
예수님의 탄생에 관하여는 마태복음 1,2장과 누가복음 1,2 장외에는 우리에게 자료를 제공해 줄만한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이번에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동원하여 한번 연구해 보고자 한다. 또한 그 동안 나와있는 여러 가지 주장들 중에 그래도 가장 납득이 갈만한 주장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성경이 던져주는 자료를 중심으로 헤롯과 관련하여 연대를 집어볼수가 있을 것이다. 그 다음에는 E. Schurer가 제시한 누가복음 2장의 인구조사에 관하여 들었던 반대 이유를 검토해 보고자 하였으며 끝으로 헤롯, 세례요한, 헤롯성전, 동방박사와 애굽으로의 돌아오심을 검토하면서 하나의 결론을 추론해 보고자 하였다.
II. 본 론
마 2장에 따르면 헤롯 대왕이 죽기 얼마 전에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음을 알수 있다. 그런데 헤롯은 B. C. 4년 4월경에 사망하였으므로 그리스도의 탄생 연도를 B. C. 5년 후반기로 볼 수 있으며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눅 3:23)는 기록을 비교해 볼 때 예수의 사역 시작 연대를 A. D. 26년의 후반기로, 또한 요한 의 사역 연대를 6개월 앞선 A. D. 26년의 전반기로 각각 확정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탄생 연도에 대하여서 그렇게 큰 문제가 따르지 않을 듯이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누가복음 2장에 기록된 인구조사에서 심각하게 부각 되어진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요셉과 마리아가 인구조사 때문에 베들레헴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인구 조사는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 정확한 문서 자료를 만들 필요를 느꼈던 아구스도(Augustus)가 명한 것이었으며 이때 모든 사람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메시야 탄생의 역사적 배경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누가는 인구 조사가 실시될 때 수리아를 통치하던 구레뇨(Quirinius)의 이름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자신의 언급이 얼마나 많은 문제를 일으킬지 그는 생각하지 못했다.
윌리엄 헨드릭슨은 그의 주석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론하고 있다:
누가복음 2:1,2에 언급되어 있는 바와 같이 인구 조사가 실시될 무렵에 헤롯 대왕(혹은 헤롯 1세)은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 그는 인구 조사가 끝난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죽었음에 틀림이 없다. 인구 조사령은 황제에 의해서 시달되었으며 적어도 23년(B. C. 27-4)동안 아구스도 황제와 헤롯 왕의 통치기간이 일치했다. 아구스도 황제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이었다. 그는 B. C. 27(혹은 이보다 조금 전)부터 A. D. 14에 죽을 때까지 로마의 황제를 지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 황제가 실제로 명령 내린 것은 단 한 번의 인구 조사가 아니라 정규적으로 있었던 인구조사라고도 말할 수도 있다. 즉 일정한 시기마다 거둘 세금을 예상해서 하는 등록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와 같은 정규적인 등록이 있었다는 사실은 더 이상 부정될 수 없다. 14년마다 등록이 실시되었음을 가리키는 보고서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즉, 이 보고서는 인구 조사가 A. D. 34, 62, 90, 104, 118, 132, 146, 174, 188, 202, 216, 230에 실시되었음이 분명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또한 이 보고서에는 A. D. 20과 A. D. 48년에 인구 조사가 있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부분도 있다.
A. D. 20년에서 14년을 빼면 A. D. 6년으로서 그해가 인구 조사가 실시됐던 해이다. 유대인 가운데 커다란 혼란을 야기시킨 인구 조사가 A. D. 6년에 실시되었음을 가리킨다.(행 5:37참조). A. D. 6년에서 다시 14년을 빼보면 첫 번 인구 조사가 A. D. 8년에 실시되었음을 알게된다. 그렇다고 인구 조사가 헤롯이 다스리던 B. C. 8에 종결되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와 B. C. 8과의 관계: 구레뇨는 B. C. 12부터 A. D. 16에 이르기까지 수리아에서 군대 총독 내지는 사령관으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누가복음 2:2에 언급된 인구조사와 그에 따른 예수의 탄생이 B. C. 8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면 삼십세 되던 해에 시작된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은(눅 3:23) 마땅히 A. D. 22년으로 추정되어야 하며, 첫 번째 성전 정화사건(요 2:12 이하)도 약 A. D. 23년으로 추정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우리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요한복음 2:20에 보면 B. C. 19년에 착수된 성전 건축이 46년 동안 이루어 졌다고 한다. 결국 46년간이란 기간으로 말미암아 첫 번째 성전 정화 사건은 A. D. 27년에 일어났으며 그리스도의 사역은 A. D. 26년에 시작되었다고 추정하게 된다. 예수의 탄생 시기를 B. C. 5년 12월 하순쯤으로 잡는 것도 납득 못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B. C. 8년은 너무 이룸 시기인 듯하다. B. C. 4년 4월 4일 혹은 그 전에 헤롯 I세가 사망했는데 바로 직전에 예수가 태어났다는 가정 하에서 연대를 산출해 보아도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때 B. C. 8의 인구 조사와 B. C. 5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예수의 탄생 사이에 있는 뚜렷한 불일치를 어떻게 설명하여야만 하겠는가? 우리는 헤롯의 치세 떼에 법령의 실행이 지연되었다고 가정하여 볼 수도 있다. 황제의 칙령을 헤롯이 머뭇거리다가 실시한 것은 이해할 만하다. 헤롯은 시달된 인구 조사령을 갑자기 실시하기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짐작컨대 그는 황제로부터 칙령 수행의 지연 허가를 얻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원래는 B. C. 8년에 실시하라고 했던 인구 조사가 결국 B. C. 5년, 혹은그 무렵에 실행되었거나 완성되었다고 본다.
이 국세조사(호적)에 관한 누가의 말에 대해서 그 역사적 진실성이 의문시된다는 수많은 반론이 제기되었다. 금세기 초에 E. Schurer는 다음과 같이 그 반대 이유를 들었다.
(1)역사에는 가이사 아구스도 당시에 전제국에 그런 국세조사가 있었다는 언급이 전혀 없다.
(2)요셉은 호적 하라는 로마의 포고령에 베들레헴으로 가야 할 필요가 없었으며 마리아를 데리고 갈 필요는 더욱 없었다.
(3)헤롯 왕이 통치하던 시대에 팔레스타인에서 로마 국세조사를 할 수가 없었다.
(4)요세퍼스는 그런 국세조사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으며 A. D. 6년이나 7년의 국세조사를 유대인의 저항을 야기시킨 하나의 혁신운동으로 생각하고 있다.
(5)그 당시에 구레뇨는 아직 수리아 총독이 아니었기 때문에 헤롯 때에 구레뇨 하에서 실시된 국세조사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비록 신약성서와 기독교 작가들의 세계를 떠나서는 이 호적에 대한 명백한 언급을 찾아볼 수가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누가의 말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이것이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일예로 요세퍼스의 저술에 중요한 사건들이 수없이 언급되었는데 이런 언급이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인 데도 그런 모든 말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요세퍼스보다는 줄곧 신빈성 있는 것으로 입증되어 온 누가의 경우에서는 어째서 그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전에 먼저 요세퍼스의 작품이나 그 밖의 곳에서 확인이 되어야 하는가? W. M. Ramsay와 그 밖의 사람들이 A. D. 1세기에는 약 14년마다 국세조사가 정규적으로 있었다며 그 중 하나가 아마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한 것일 거라고 밝혔다.
(눅 2:1-3)여기서 누가는 요셉과 마리아를 베들레헴으로 가게 하는 역사적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천하, 이를테면 로마제국 전역이 세금을 내야 한다는 명을 내렸다. 이 가이사(시이즈 또는 케사르)는 B. C. 30년에서 A. D. 14년 8월 19일까지 통치한 사람이다. 그는 빈틈없는 정략과 군사적인 힘으로 여러해 동안 로마 전역에 일어난 그 무서운 내란과 그에게 도전하는 모든 저항을 진압한 다음에 40년 동안 절대적 군주로서 로마 제국을 다스렸다. 그는 평화스럽고 관대한 통치를 통해 세계적으로는 전례없는 외적인 평정을 가져다주었고 그의 대 제국에는 후에 기독교 확산을 용이하게 한 영구한 조직을 만들었다. 아구스도가 명령한 그 인구조사에서는 성명, 직업, 재산, 친척관계를 관청 기록부에 등록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경우의 인구조사는 아마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 같다. 누가는 이 세금 징수를 "첫번 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그것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 있었던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가 사도행전 5:37에 언급하고 있는 A. D. 6년에 있었던 잘 알려진 그 호적과 구벌하기 위해서 그것을 "첫번 한 호적"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첫번 호적"에 대해서 우리는 신약성경 이외에 직접적인 다른 언급을 찾아볼 수가 없다. 구레뇨는 A. D. 6년에서 9년까지는 물론 예수님이 나기 10년 전 어느 때에 수리아 총독이었다는 명걱의 증거가 있다.
누가복음 2장 1절에서 허용될 수 있는 번역 즉"이 호적 등록(인구조사)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었을 때에 한 호적이전이었다"를 채용한다면, 이 점에서 아무런 어려움도 생기지 않는다. 인구조사가 헤롯 치하의 유대에서 실시되었다면, 그것은 주전 10-9년(아마 14년 주기의 첫 번째)에 속주들에게 부과된 정규적 인구조사였을 것이고 2,3년동안 유대의 특별한 위치 때문에 연기되었을 것이다. 주전 10-9년과 직후에 로마 제국의 여러 부분에서 인구조사를 실시한 증거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데, 이집트로부터의 증거가 실질적으로 결정적인 것이다. 각 가장이 인구조사를 위하여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관습이 이집트에서 강화되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 그러나 이 관습은 이집트에 국한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2)이미 발견된 이집트의 C. Vibius Maximus의 완벽한 고지서는 누가가 묘사한 호적 방법이 이집트의 관습과도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고향을 떠나 있는 모든 사람들은 호적을 하러 그들의 관할 거주지로 돌아오라는 지시를 받는다.
모든 사람들이 호적 하러 각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는 말의 진실성도 역시 뚜렷하게 입증되고 있다. 아구스도가 속국 민족의 관습을 세심하게 고려한 것은 그들을 다스리는 그의 정책의 특징이었다. 특별히 그가 유대인의 왕으로 통치한 헤롯을 통해 그 호적을 하게 했기 때문에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서 주민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여 과세하려고 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목수인 요셉이 자기가 다윗 혈통에 속한 것을 알았고 또 그것을 증명할 수 없었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로마의 국세조사에서는 여자도 세금을 내야 하지만 반드시 직접 가서 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요셉이 불가피하게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가야 했다는 사실에는 몇 가지 고려할 점이 있다. 마리아가 첫아들을 해산할 때가 이미 가까웠기 때문에 요셉은 그녀를 나사렛에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요셉과 결혼한 지 아홉 달도 못되는 것으로(1:56)알고 있는데 그녀가 아이를 낳게 되면 아마 모욕과 불신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염려도 있었던 것이다. 또 요셉과 마리아는 미가서 5:2 절에 의하여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는 것을 알고서 그리로 함께 가기로 결정했는지도 모른다. 약속된 구속자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는 것은 그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 가운데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일이었다.
- 시리아에서는 12살 또는 그 이상된 여인들은 모든 납세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마리아와 요셉은 모두 등록장소에 출두하여 누가 세금을 납부할 것인지를 결정 받아야 했을 것이다.
(3)여기서도 Schurer는 오진하고 있다. 헤롯 대왕은 엄격한 의미에서 팔레스타인을 다스리는 왕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황제란 대군주 아래 있는 하나의 봉신왕에 불과했다. 요세퍼스는 아구스도가 통치 말년에 유대인들에게 충성을 바치겠다는 맹세를 하라고 요구했다는 말까지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팔레스타인 거민에게 모두 세금을 내라는 포고령을 내린 것도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인정된 유대인 관습에 따라 그는 그 국세조사를 헤롯의 재량에 맡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헤롯 통치 마지막 몇 덜 동안에 아구스도가 팔레스타인도 호적을 해야 한다는 명을 내린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헤롯이 나이와 병 때문에 오래 살지 못할 것이므로 앞으로 팔레스타인을 다스릴 문제와 관련해서 그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자명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4)비록 요세퍼스가 헤롯의 죽은 다음에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당시(A. D. 6년경)의 과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긴 하지만 그는 어느 곳에서도 이것이 첫 번째 한 국세조사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는 그것이 유대인들 가운데 소요를 일으켰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아구스도가 팔레스타인 업무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아직도 헤롯에게 상당한 재량을 허용 허고 있었기 때문에 헤롯 당시의 국세조사가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실시되었지만 후에 이과세는 훨씬 더 로마의 억압과 지배의 형태로 나타난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 이것은 요세퍼스가 기술한 내용으로 보아 명백하게 그 과세기 유대인들에게 반발을 일으킨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지 그것이 첫 번째 한 과세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5)신약성서 이외에 다른 곳에서 구레뇨가 그보다 이른 시기에 벌써 수리아의 공직자의 자격으로 대행업무를 보고 있었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는 것이 상당히 널리 인정되고 있다. Mayor 박사는 The Mission and Message of Jesus(p.267)란 책에서 "그 증거에 대한 비평적인 조사는 구레뇨가 보다 이른 시기에 수리아에서 공직을 갖고 있었다는 견해를 뒷받침한다"는 말을 받아들이고 있다.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직을 두 번 가졌다는 데 대한 증거는 확실하다"고 W. M. Calder교수는 말하고 있다.
구레뇨가 보다 이른 시기에 총독직을 가졌다는 것이 B. C. 10년에서 7년 사이인지 아니면 B. C. 3년에서 2년 사이인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 Ramsey는 그가 이른 시기에 총독직을 가진 때가 B. C. 10년에서 7년 사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는 이 기간에 구레뇨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도에서 어떤 군사적인 목적을 위해 특별 로마 교황 사절로 할동하고 있었으며 이때 민정장관은 Sentius Saturninus였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재임기간(B. C. 8 - 6)에 예수님이 탄생하셨다고 터툴리안이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다. 이럴 경우 그 국세조사는(특히 팔레스타인에서) 1년 내지 2연후까지 완성된 것 같지는 않지만 구레뇨가 총독직을 대행하여 로마교황 사절로 있을 당시에 실시되었을 것이다. 만일 그의 첫 수리아 총독 임기가 B. C. 3년에서 2년까지 였다면 그것은 특별 임명이 아니라 정식 임명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누가가 의미하는 것은 (B. C. 4년에 죽은 헤롯 대왕이 나직 살아 있을 당시에)구레뇨가 총독이 되기 1-2년 전에 시작된 그 국세조사가 그의 총독 재임기간에 완성되어 로마로 보내졌다는 것이다. 그 어떤 경우이든 구레뇨가 실제로 그 국세조사를 실시할 필요가 없었으며 또 누가도 그가 그렇게 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가 구레뇨를 언급한 것은 단순히 그 국세조사의 연대를 암시하고 결과적으로는 그 거룩한 탄생의 연도를 말해주기 위한 것이다
이종윤의 신.구약 성경 개설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납득이 가는 이론을 발견할 수가 있다.
- 헤롯이 B. C. 4년에 죽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헤롯이 살아 있을 때(마 2:1) 탄생하셨으니 B. C. 4년 또는 그 이전에 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 세례요한이 전도활동을 시작한 때를 기점으로 예수의 출생시기를 알아낼 수도 있다.
눅 3: 1,2에는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다섯해 때에 세례요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디베료 가이사 15년은 A. D. 26년에 해당한다. A. D. 26년에는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있었던 때이기도 하다.(눅 3:1). 그때에 예수의 나이가 약 30세쯤 되었었다(눅 3:23). 그리고 세례 요한이 예수보다 6개월 먼저 났으니, 그의 나이도 30세쯤 되었던 때다. 그런고로 A. D. 26년에서 30년을 뒤로 계산해 보면, 요한과 예수의 출생한 시기를 짐작하게 된다. 즉 B. C. 4년 또는 5년경이 될 것이다.
- 헤롯 성전을 짓기 시작한 때를 계산해 냄으로서 그리스도 출생 연도를 알 수도 있다. 헤롯 성전은 B. C. 20년 또는 19년에 시작되었다. 요 2:19-20을 보면 예수의 공생애 활동의 초기 사역시 헤롯 성전이 46년 동안 지어졌다고 했다. 이 때가 주후 27년 또는 28년경이니, 예수의 공생애 활동을 시작한 지 6개월 정도 지난 때이다. 즉 예수의 공생애활동 시작이 26년 또는 27년경이라면 그의 출생은 주전 4년 또는 5년으로 볼 수 있다.
-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근거해서도 알아볼 수가 있게 된다.
아마도 동방박사들은 예수 출생 후 2년 정도 지난 뒤에 찾아왔을지도 모른다.(마 2:7, 26). 헤롯이 그 때를 자세히 묻고 계산해서 두 살부터 그 아래를 죽인 것이다. 마 2:16절의 유아 살해는 헤롯이 늦어도 (B. C. 4)에 일어난 사건이다. 동방박사들. 유아 살해사건이 늦어도 B. C. 4년 또는 5년에 일어났다면 동방 박사들의 방문은 B. C. 6년 또는 7년까지도 생각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리스도 탄생과 동방박사들의 방문은 적어도 1년 내지 1년반의 시간적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애굽으로 피난 갔다가 나사렛으로 돌아옴.(마 2:13-15, 19-23)
피난간 때와 돌아온 시기를 말하기 위해서는 B. C. 4년 유월절 직전에 죽은 헤롯의 사망 날짜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즉 B. C. 4년 유월절 전에 애굽에 피난 갔을 것이고, B. C. 4년 유월절 이후에 나사렛으로 돌아왔을 것이 확실하다(마 2:15).
- 예수님의 탄생 연도를 터너(Turner)는 B. C. 7-6년으로, 모팟(Moffatt)은 약 B. C. 6년으로, 헤드람(Headlam)은 B. C. 8-7년으로, 그리고 스트리터(Streeter)는 B. C. 4년 이전으로 계산한다. B. C. 8년의 인구 조사는 고대에 처음으로 시행한 것이었으며 또한 유대 지역 통치의 특수성 때문에 3년, 혹은 4년 정도 지연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 예수의 탄생 연대에 대하여,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서력은 약 4년의 오차가 있다. 그 잘못은 수도사인 디오니시우스가 범한 것으로 그는 그리스도 기원을 정하면서 계산의 착오를 일으켜 4년 모자라게 계산한 것이다. 신성종박사는 예수의 탄생의 연대에 관한 논쟁을 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III. 결 론
그 동안의 여러 자료들을 모으고 공부하며 여러 사람들의 주장들과 추론들을 생각하여 보았다. 그러나 확실하게 이것이다 라고 주장할만한 확실한 근거들이 너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오래 전부터 예수님의 탄생 년도와 인구조사를 연구한 학자들이 많았으나 그 누구도 확실한 대답을 주지 못하고 있는 이 마당에 감히 한 신학도가 이것이다라고 할만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큰 착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름대로 연구하고 자료들(헤롯, 동방박사, 유아학살, 세례요한, 헤롯성전, 인구조사...)을 검토하는 가운데 가장 공감이 되는 부분은 예수님의 탄생 년도를 주전 5세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성이 있게 보인다.
금번 이 연구를 통해서 그 동안 의심없이 당연한 것으로만 생각해왔던 예수님의 탄생 년도와 인구조사에 얽힌 복잡한 내용들에 대하여 공부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허락해주신 교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처음에 자료를 찾을 때는 너무 자료가 없어서 고민도 하였지만 여러 기독교 서점과 신학교 도서관(총신대,장신대)들을 찾아다니면서 조금이나마 자료들을 모을 수 있게 되었으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면서 배운 것이 참으로 많았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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