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개월째 거리에서 산다…26살 노숙인 택용씨 이야기


7개월째 거리에서 산다…26살 노숙인 택용씨 이야기


택용씨와의 첫만남. 국민일보


후줄근한 티셔츠에 때 묻은 녹색 바지, 누렇게 변한 에코백…

남루한 차림의 이 청년은 올해 26살 윤택용(가명·사진)씨다. 겉보기에는 보통의 20대처럼 보이지만 남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코를 찌르는 시큼한 냄새, 검게 썩은 치아, 얼룩진 마스크, 거무스름한 턱수염까지. 그는 7개월째 거리 생활을 하고 있는 ‘20대 노숙인’이다.

택용씨를 처음 알게 된 건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서다. 지난달 2일 그는 “마지막 가족인 아버지를 여의고 공원에서 노숙자로 생활하고 있다”며 “다시 일어서고 싶다. 일하고 싶다”고 글을 올렸다. 나이가 어리단 이유로 노숙자 쉼터에서 거절당했고, 등록된 거주지가 없어 긴급생활지원도 받지 못했다는 내용도 함께였다.

무엇이 이 청년을 거리로 내몰았을까. 국민일보는 지난달 29일부터 이달 2일까지 택용씨와 동행하며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기울어진 가세, 뜻밖의 생일 선물



택용씨와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나눴다. 국민일보


택용씨는 어머니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한 살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헤어졌고, 일곱 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 홀로 남은 택용씨를 키운 것은 조부모님이었다. “할아버지가 골목을 돌아다니시면서 리어카로 파지와 공병을 수거하셨어요. 저도 따라다녔고요. 그게 유일한 생계 유지 수단이었습니다”

가난한 가정은 쉽게 휘청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할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에 빠졌고, 어린 손자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리어카가 쉬는 날도 잦아졌다. 할아버지의 병세가 심해질수록 가세는 점점 기울었다. 이사를 거듭할수록 집은 점점 작아졌다.

16살이 되던 2011년 생일날, 택용씨는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집에 왔더니 어릴 적 헤어졌단 아버지가 와 계셨습니다. 제가 사는 환경을 보고는 천안에 내려가서 같이 살자고 하셨어요. 어린 마음에 원망을 먼저 했어요. 왜 이제야 데리러 왔느냐고. 둘이 껴안고 한참 울었던 것 같아요.”

택용씨는 8평 원룸에서 아버지와 살았던 때를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아버지는 퀵서비스, 저는 PC방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아버지가 신용불량자셔서 넉넉하지는 않았죠. 월세 내고 나면 얼마 안 남았으니까. 근무 시간대가 달라서 제가 퇴근하면 아버지가 출근하셨었는데, 겹치는 시간이 딱 저녁 시간대였어요. 같이 요리하고 저녁 먹던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아요.”

"택용아 잘 들어. 아빠가 병에 걸렸대"


  
지난해 12월 아버지의 상태가 위중해지자 택용씨가 SNS에 올린 고민글. 국민일보


지난해 2월 병원에 간다고 집을 나선 아버지는 3일 만에 집에 들어와 대뜸 종이를 내밀었다. 진단서엔 이름도 생소한 병명이 적혀 있었다. 근위축성측색경화증, 일명 루게릭병이었다. 몸의 근육을 마비시킨다는 이 병은 서서히 아버지의 몸을 잠식했다. 멀쩡히 걷다가 다음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고, 그다음 날은 앉지도 못하게 되는 식이었다. 8월쯤이 지나선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저한테 마지막 남은 가족이 아버지인데…. 루게릭병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거든요.”

가난은 좌절할 시간도 허락하지 않았다. 움직이지 못하는 아버지를 간병하기 위해 다니던 아르바이트를 그만둬야 했고, 당장 내야 할 월세가 목을 조여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수중에 있던 돈은 약 600만원. 아버지가 의료보험비 미납으로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던 터라 병원을 한 번 갈 때마다 약값을 제외한 치료비만 90만원이 넘었다. “3개월에 한 번씩 병원에 가야 했어요. 병원 몇 번 가고 월세 좀 내니까 금세 돈이 떨어지더라고요.”

결국 지난해 12월 14일 새벽 4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택용씨는 잠시 말을 멈추고 목을 가다듬었다. “음식을 못 드시니까 설탕물을 만들어 빨대로 드렸었어요. 그런데 아침에 보니까 설탕물이 하나도 안 줄었더라고요. 일어나어서 ‘왜 이거 안 드셨대?’하고 몸을 만져봤는데 차갑더라고요. 그렇게 돌아가셨어요.”

“장례 마치고 집에 못 들어갔어요. 아버지 냄새가 나서”


  
노숙 생활을 하면서 택용씨가 SNS에 올린 글. 국민일보


유일한 버팀목이 사라지자 택용씨는 인생을 놓아버렸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정신적으로 모든 걸 놓아버렸어요. 다 포기했던 것 같아요. 집에도 한 달 정도 못 들어갔어요. 아버지 냄새가 원룸 밖까지 나는 것 같아서요. 세상에 정말 홀로 남겨졌다는 생각에 아무것도 못 했어요. 일을 못 하니까 월세를 못 냈고, 그래서 쫓겨난 거죠.”

그렇게 26살 택용씨의 노숙 생활은 시작됐다. 첫 잠자리는 충남 천안 터미널 고가도로 밑 폐아파트였다. 이후엔 공원 벤치, 공중화장실, 으슥한 골목 등 거리를 전전했다. 젊은 노숙인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따가웠지만 택용씨는 부끄러워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고 한다. “첫 두 달은 아예 기억이 없어요. 멍하니 앉아서 울다가 잠든 게 다였던 것 같아요. 정신이 돌아오면 계속 토하고.”

가장 힘든 것은 배고픔이었다. 택용씨는 매일 밤 취객들이 남긴 음식을 찾아 천안 유흥가 거리를 떠돌았다. 테이크아웃 잔에 남은 음료와 쓰레기통 위 버려진 감자튀김이 택용씨의 주식이었다. “대부분은 상한 음식이었습니다. 먹으면 다음 날 탈이 날 걸 알면서도 배가 너무 고파 먹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노숙 생활 두 달 만에 몸무게가 20㎏ 넘게 빠졌습니다”

노숙 생활 4개월 차가 되던 5월, 택용씨는 다시 일어서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한 일은 공원 화장실에서 휴대폰을 충전해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버려진 음식을 주워 먹은 탓에 윗니가 모두 썩어 빠져버렸고, 이런 외관 때문에 면접을 통과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여파도 한몫했다. “77군데 지원을 했는데 다 떨어졌어요. 그나마 연락이 온 곳도 다단계 업체의 취업 사기였어요.”

"노숙자 쉼터, 동사무소, 지원센터 모두 갔지만…"


  
희망지원센터에 서 있는 택용씨. 코로나19로 당일 입소가 불가능해 노숙인들이 컨테이너 안 벤치에 앉아있다. 국민일보


일자리를 찾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자 택용씨는 노숙인 지원 제도를 찾아 나섰다. 무일푼에 핸드폰 사용도 어렵던 택용씨는 일반인에 비해 정보 접근성이 떨어졌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몸으로 직접 부딪히는 일뿐이었다. 지난 6월 동사무소, 서울특별시립 다시서기 종합지원센터 등에 방문했다. 제도적 지원을 기대했던 택용씨는 현실의 쓴맛을 다시 한번 느꼈다.

“처음 다시서기 센터를 갔는데 노숙자 쉼터를 추천해줬어요. 그런데 쉼터에서 저를 거절하더라고요.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40~60대 노숙인들과 어울리기 쉽지 않을 거라고요. 다행히 한 곳에서 연락이 왔는데 그곳도 입소한 지 일주일 만에 뛰쳐 나왔어요.”

택용씨를 쉼터에서 쫓아낸 것은 다름아닌 다른 노숙인이었다. 쉼터에 붙박이처럼 있던 기존 노숙인들은 굴러들어온 돌을 반기지 않았다. “제 자리가 2층 침대의 위층이었어요. 그런데 올라갈 때마다 침대가 삐걱거린다고 엄청 화를 내시는 거예요. 물도 못 마시러 갔어요. 하도 뭐라고 하니까 나중에는 침대에 못 올라가고 그냥 바닥에 쭈그려서 잤어요. 못 견디겠더라고요.”

  
동사무소에서 상담을 받는 택용씨. 국민일보


주민센터에서도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규정상 긴급주거지원금(3개월간 최대 100만원 월세 제공)과 기초생활수급자 심사를 받기 위해선 등록된 거주지가 있어야 하는데 택용씨의 경우 노숙인이라 거주지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집이 없어 이곳을 찾았지만, 집이 있어야 주거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먼저 거주지 등록을 한 뒤 지원금을 받아 월세를 후납하는 방법도 불가능했다. 워낙 말없이 도망가는 사람이 많다 보니 고시원 측에서 계약금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가난과 좌절, 포기도 반복되다 보니 점점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방법을 찾아보려고 이곳저곳 뛰어다녔어요. 그런데 이런저런 이유로 좌절될 때마다 ‘나는 뭘해도 안되는구나’ 싶더라고요. 몸도 마음도 약해지면서 자신감도 사라졌어요. 사람들과 만날 때도 눈치를 보고 점점 도태되는 기분이었어요.”

정말 방법이 없을까. 기자는 다시서기센터에서 진행하는 ‘임시거주지원사업’을 찾아 택용씨에게 알려줬다. 노숙인을 대상으로 1~2개월 간 고시원·쪽방 월세 25만원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돈으로 임시 거주지를 마련하면 거주지 등록도 가능해 기초생활수급자 신청도 할 수 있었다.

택용씨는 당혹스러운 듯 보였다. “이런 제도가 있었다는 것을 처음 들었어요. 6월에 갔을 때 이 제도는 전혀 설명해주지 않고 그냥 쉼터로 가라고만 했거든요. 처음부터 설명을 잘 해줬으면 이렇게까지 떠돌이 생활은 하지 않았을 텐데. 노숙인을 위한 제도지만 막상 길 위에 놓인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는 게 참 답답한 것 같아요.” 택용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본어 통역가가 되고 싶어요"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택용씨. 국민일보


택용씨는 2일 대전으로 향했다. 기자의 소개로 알게 된 자선단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자선단체는 택용씨에게 2개월간 주거지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덕에 택용씨는 긴급주거지원금을 비롯한 기초생활수급자 신청, 구직 등을 알아볼 수 있게 됐다.

택용씨는 누구보다 자활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얼른 일을 해 신세 진 사람들에게 갚고 싶다고도 했다. 기차역에서 택용씨가 쭈뼛대다 대뜸 말을 건넸다. “제 꿈은 원래 일본 통역가였어요. 어린 시절 일본 드라마를 워낙 많이 봐서 의사소통을 곧잘 해요. 이런 특기를 살려보고 싶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아쉽네요. 나중에 다시 도전해보고 싶어요,”

택용씨는 한참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어갔다. “노숙인이라 하면 정신적으로 아프거나 알코올 중독자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게을러서 이렇게 됐다고 손가락질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열심히 살아도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기차에 타기 전, 택용씨는 삶에 대한 각오도 전했다. “제가 살아온 환경이 녹록치는 않았지만, 그걸 탓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살아볼 거예요. 제가 받은 만큼 꼭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김지은 인턴기자, 이홍근 객원기자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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